5. 차도지계(借刀之計)

"신라는 가라국에 비해 그 영토도 넓고 산과 들이 많아 농산물이 풍부하여 백성의 수가 많소이다. 백성이 많다보니 군사의 수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라에는 단 한 가지가 부족하오. 그건 바로 쇠요."

그랬다. 어라하 명농의 말처럼 신라에는 철관련 산업이나 이에 종사할 기술자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렇다보니 쇠맥을 탐사해 찾아낼 수도 없었고, 또 캐낸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물론 일부 지역에 철광이 있기는 했지만 제련기술이 고구려, 백제, 가라에 비해 떨어지다 보니 그 생산되는 철의 품질 역시 떨어져 강도 높은 무기나 농기구를 만드는데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그 양이 매우 적은 터라 군대를 무장시키고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양에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세작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라는 땅덩어리가 넓지만 쇠를 찾아내고 뽑아내는 기술이 매우 뒤떨어져 있다 하오. 그렇다보니 신라에는 늘 쇠가 부족해 군사들을 제대로 무장시키지 못하고 있소. 아마도 백제, 고구려, 신라, 가라 중에서 쇠갑(鐵甲)으로 무장한 병사의 수가 가장 적을 것이외다."

어라하 명농의 말처럼 신라는 장수들과 일부 기동군단 성격 중앙군, 그리고 고구려 및 백제와의 주요 접경지역에 주둔하는 접경지역 지방군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소나 돼지 등 각종 짐승으로 만든 가죽으로 만들어 검은 색 또는 회색으로 물들인 갑옷을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부족해 심지어 나무로 만든 목갑옷(木甲)을 착용한 군사들도 있었다.

"신라는 건국이후 지금까지 방어적 입장을 버린 적이 없소. 그나마 험준한 산과 깊은 강이 신라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짐이 단언하건데 지금 동쪽의 신라라는 나라는 없었을 것이오."

어라하 명농의 지적처럼 신라는 박혁거세가 건국한 이후에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한 영토전쟁에서 늘 침략을 당해온 형편이었다. 반대로 선제 침략하여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영토를 빼앗은 경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만약 어라하 명농의 말처럼 높이 1,000m급 이상의 험준한 고개인 죽령(竹嶺)과 조령(鳥嶺) 그리고 신라의 서쪽을 휘감고 흐르고 있는 황산강 등의 천혜의 험지(險地)가 아니라면 쉽사리 국경을 돌파당해 신라의 영토는 대폭 축소 또는 아예 존립자체가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저작권자 © 양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