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 시인의 문화기행] 24. 여인들의 왕국, 대가야 中
가야 토벌의 선봉장 이사부와 휘하 장수 사다함의 사연
칼(刀)이 지배하던 시대의 대가야는 바로 여인들의 왕국
대가야는 왕권유지를 위한 근친혼 등 혈연관계 이어지고
망국의 한을 품은 마지막 왕 도설지는 월광사 짓고 승려

월광사지 3층석탑(보물 제 129호)
월광사지 3층석탑(보물 제 129호)

고령의 반파국(伴跛國)은 전화(戰禍)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 비켜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후진국이었다. 그런데 해안지역의 세력들이 전란을 피해 낙동강을 거슬러 모여들면서 반파국은 새로운 맹주국으로 부상했다. 이를 후기 가야연맹 혹은 대가야연맹이라 한다. 후기 가야연맹 즉 대가야는 반파국을 중심으로 보다 강력한 집단체제를 형성했다. 5세기 후반부터는 중국 남조의 제(齊)에 사신을 보내는 등 삼국관계의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백제,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고 백제, 왜와 더불어 신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6세기 초에는 백제와의 국경지역인 기문(己汶. 지금의 임실)지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일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패하고 왜와의 교역중심지인 대사(帶沙. 지금의 하동) 지역마저 백제에게 빼앗기게 되면서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요충지에 성을 쌓고 신라왕실과 결혼동맹까지 맺어가며 연맹체 존립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562년(신라 진흥왕 23년) 신라의 장수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에 의해 패망의 무릎을 꿇고 만다.

▶사다함과 미실의 러브스토리
진흥왕 23년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의 기병을 이끌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에 들어가서 흰 깃발을 세우자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할 때 사다함이 으뜸이었으므로 왕이 좋은 토지와 포로 2백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이 세번이나 사양하였다. 왕이 굳이 줌으로 이에 받아서 포로는 풀어주어 양인이 되게 하고, 토지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나라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사다함은 신라 화랑 5대 풍월주로 이때 나이 16세였다. 신라 제일의 미인으로 세종의 귀비가 된 미실(美室)과의 미완의 러브스토리는 슬픈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세종은 이사부(苔宗)의 아들로 6대 풍월주. 이사부는 신라 17대 내물왕의 4대손이고 세종은 5대손이다.

靑鳥靑鳥彼雲上之鳥
(청조청조피운상지조) 
파랑새여 파랑새여 
저 구름 위의 파랑새여

胡爲乎止我豆之田
(호위호지아두지전) 
어찌하여 내 콩밭에 머물었던고

胡爲乎更飛入雲上去
(호위호경비입운상거) 
어찌하여 날아들었다가 
다시 구름 위로 갔다는 말인가  - 중략

靑鳥歌(청조가) / 斯多含(사다함)

▶불교설화에서 찾는 가야 역사
대가야라는 명칭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금관가야(金官伽倻)를,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고령지방에 존재했던 가야를 지칭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 기록을 따르고 있다. <삼국사기>는 '대가야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王)으로 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지속됐다'고 전하고 있다. 
사서에 왕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시조인 이진아시왕과 9대 이뇌왕(異惱王), 16대 도설지왕 등 세 왕과 마지막 비운의 월광(月光) 태자에 불과하다.

가야의 역사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극히 단편적으로 전하고 있어 김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국을 제외하고는 왕계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다만 신라와 백제와의 관계 속에서 혹은 불교설화 속에서 일부 왕들의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남당 박창화(朴昌和. 1889~1962, 화랑세기 필사본을 남긴 재야 사학자)의 유고집 신라사초(新羅史草)에는 대가야의 왕계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신라사초에서는 대가야의 왕계를 시조 이진아시왕(재위 158~177)부터 마지막 19대 도설지왕(재위 ?~ 562)까지, 삼국사기 보다 3왕이 더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모두 19명의 왕 가운데 여자가 나라를 다스린 여왕이 절반이 넘는 10명이나 된다는 것. 

3대 비가(毗可), 4대 미리신(美理神), 5대 하도(河道), 6대 하리(河理), 8대 하리지(河理知), 9대 선실(宣失), 12대 후섬(厚蟾), 14대 섬신(蟾神), 15대 아리(阿利), 17대 청렵(靑獵)이 모두 여왕이다. 칼(刀)이 지배하던 시대의 대가야는 바로 여인들의 왕국이었다.

대가야 왕릉 전시관
대가야 왕릉 전시관

▶왕권유지를 위한 근친혼
가야에 대한 신라사초의 내용은 주로 철저한 혈족중심의 왕위 승계와 국가의 존립을 위해 금관가야나 신라 등 상대국과의 왕족결혼을 통한 동맹 등이다. 

3대 비가여왕의 경우 금관가야국 거등(居登. 왕으로 추정)의 여동생으로 아수왕의 왕비가 된다. 219년 아수왕이 죽자 왕위에 오르면서 서자인 우리(宇理)를 새로운 국서(國壻)로 택하고 그 사이에 미리신 공주를 낳는다. 그리고 231년 비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딸 미리신 공주가 4대 왕위에 오르고 미리신 여왕도 우리를 국서로 삼는다.

비록 서자이긴 하지만 아들을 남편으로 삼고 그 딸은 아버지와 혼인하는 등 <신라사초> 내에서의 대가야 왕계는 왕권유지를 위한 상상을 초월한 근친혼 등 혈연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비록 <신라사초> 내용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비해 그 진위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베일에 가려진 가야사를 한층 흥미 돋게 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은 9대 이뇌왕(異腦王, 494~?)이다. 시조 이진아시왕의 8세손으로 신라의 양화공주(兩花公主)와 동맹결혼 했다. 양화공주는 소지마립간의 정비 선혜부인과 호조와의 사이에 태어났으며 이찬(伊飡) 비지배(比枝輩)의 누이. 법흥왕이 이들의 혼인을 주선했다. 대가야 마지막 비운의 왕자로 알려진 월광태자(月光太子)와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 그리고 월화공주(月華公主)를 낳았다. 월화공주는 뒤에 가야제국을 평정한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 534~576, 재위 540~576)의 후비가 된다. 도설지왕을 월광태자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대가야 박물관
대가야 박물관

▶마지막 비운의 왕자 월광태자
신라가 562년 고령의 주산성을 함락하고 대가야를 복속시킨 후 전란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월광태자를 왕으로 내세웠다는 설이다. 그러나 신라는 급기야 도설지왕까지 내치고 영토를 통합했다. 망국의 현실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도설지는 월광사를 짓고 승려가 되었다. 월광태자가 망국의 설움을 씹으며 고령과 합천의 경계 미숭산을 넘어 절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는 월광사지는 경남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에 있었다. 

해질녘에 들려본 월광사지엔 통일신라시대의 3층 석탑(보물 제129호) 2기가 어스럼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50년전 이곳 빈터에 새로 지었다는 월광사 암자 툇마루에 앉아 보살이 주는 얼음 수박 한 쪽으로 더위를 식히면서 상념에 젖는다. 신라에 망국의 울분을 삼키며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와 백제에 백마강 낙화암 궁녀들의 치맛자락을 잡던 부여융(扶餘隆)이 있었다면 대가야엔 월광태자가 있었다. 그들은 다 같이 꺼져가는 국운의 등불 앞에 흔들리던 비운의 마지막 왕자들이었다. 
동으로는 낙동강 일대, 서로는 섬진강 일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신라 백제와 대립하면서 뛰어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고령 대가야, 그렇게 강력했던 대가야도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미지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 것이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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