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 시인의 문화기행] (5)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上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의 심신의 안식을 위해 만든 연못
1974년 경주 관광종합개발사업 과정에서 찾은 유물과 유적
당나라의 대명궁과 백제의 궁남지를 보고 벤치마킹 추정

기러기도 여정의 날개를 접고 쉬어가던 동궁과 월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던가. 강산이 서너번 쯤 바뀐 뒤 다시 찾아간 월지, 잔잔한 상념의 물결이 인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만해도 안압지(雁鴨池)라 불렀는데 언제부터 ‘동궁(東宮)과 월지(月池)’로 바뀌었는지, 건물과 조명시설 등 단장된 모습이 어쩐지 생경스럽다.

안압지는 조선시대 묵객들이 폐허가 된 못에 기러기(雁)와 오리(鴨)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지은 이름. 신라 때는 월지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몇몇 문헌에 남아 전해 오고 있다. 그래서 임해전과 함께 번영과 멸망의 영욕이 서린 이곳의 그날을 찾기 위해 이름을 바꿔 부른 것인가. 방랑의 시인 묵객들이 동병상련의 애상에 젖어 불렀던 안압지, 얼마나 운치 있고 정감어린 이름이었던가.

▶ 사금갑의 설화를 남긴 천주사

안압지는 천주사(天株寺) 북쪽에 있다. 문무왕이 궁 안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무산 12봉을 상징하여 화초를 심고 짐승을 길렀다. 서쪽에는 임해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밭이랑 사이에 그 주춧돌만 남아있다-《동국여지승람. 1486년 편찬》
이 기록으로 볼 때 안압지라는 지명은 적어도 5백년 이상 사용되어 왔다. 천주사는 반월성과 월지 사이 궁내에 조성된 내불당(內佛堂)이었다.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유명한 사금갑(射琴匣)의 설화를 남긴 곳.

소지왕(488년)이 정월 대보름날 천천정(天泉亭)행차에 나섰는데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다. 쥐가 말하기를 “까마귀를 따라 가십시오” 하여 신하가 따라갔다. 연못에서 노인이 나타나 서찰을 주면서 왕에게 전하라 했다. 겉봉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開見 二人死 不開一人死)”고 쓰여 있었다. 일관이 말했다 “두 사람은 평민이고 한 사람은 왕입니다” 왕이 뜯어보니 ‘사금갑(射琴匣)’. 즉 사금갑을 쏘아라 는 글이 나왔다. 궁으로 돌아 온 왕은 왕비의 침실에 있는 거문고 갑을 활로 쏘았다. 그 속에는 천주사 내전의 분수승(焚修僧.향불 피우는 승려)이 왕비와 정을 통하다 화살에 맞아 죽어 있었다

《삼국유사》

노인이 글을 전해준 못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이때부터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 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

반월산성에 흐르는 달빛이 눈물 한 방울 떨궈 놓은 것 같은 월지는 신라왕조 번영의 영광과 멸망의 비운이 서린 슬픈 유적지다.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은 비록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지만 심신은 오랜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전장의 말발굽에 초개같이 쓰러진 수많은 목숨들에 대한 인간적 고뇌는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승리한 전쟁은 번영과 환락을 함께 부른다.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심신의 안식을 위해 조성한 궁원지(宮苑池)가 그랬다. 왕은 이 곳에 동궁(東宮)을 짓고 남쪽에는 아름다운 월지를 꾸몄다. 이 일대가 통일신라의 영화가 피고 진 임해전지(臨海殿地). 후세의 사람들은 이곳을 ‘사적 제18호, 동궁과 월지’라고 명명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 뺏고 빼앗기는 15년 전쟁을 치렀다.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한 문무왕은 고조선의 한민족이 동진(東進)의 대이동을 시작한 이래 여러 국가로 갈라진 종족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는 대역사를 이루게 된다.

서기 674년, 문무왕은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와 전쟁후의 잉여인력을 활용, 왕궁을 확장하는 대역사를 시작했다. 궁내에 동궁을 짓고 월지를 건설했다.

삼국사기에도 ‘문무왕 14년(674년) 2월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아름다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월지의 조성연대가 6세기였음을 알 수 있다. 사학자들도 발굴된 유물 등을 미루어 사기의 기록이 맞다고 추정했다.

▶ 준설공사로 시작된 발굴

불사(不死)의 영원과 아름다운 미학을 갖춘 궁원지로 신선의 경지에 이른다는 월지는 수십 세기 동안 폐허로 방치돼 오다가 근대들어 유원지로 개발됐다. 국내는 물론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경주관광코스의 명물로 변모했다. 신혼의 청춘들과 외국인들은 특히 오색찬란하게 불 밝힌 야경을 선호한다. 환타지한 밤의 정경은 내밀한 궁녀들의 내실을 들여다보는 듯.

월지는 1974년 경주시가 관광종합개발사업을 벌이면서 발굴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오랜 세월 폐허가 된 건물지와 매몰된 연못으로 놀이터와 낚시터에 불과했다. 당시 대통령도 월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인부와 준설장비가 동원된다. 인부들은 못 안의 물을 빼고 진흙탕 속에 들어가 천년 묵은 흙을 걷어내고. 처음엔 인부들이 뻘 구덩이 속에서 아무 물건이나 마구 건져내거나 부숴 버리기도 했다. 목선(木船) 조각이 나왔을 때는 작업에 방해가 된다며 삽과 곡괭이로 찍어 훼손시키기도 했다. 그 때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최고 오래된 목선으로 현재 경주박물관에 복원, 전시돼 있다.

월지에 대한 학술적 발굴은 이처럼 처음부터 계획되지 않은 단순 준설작업으로 시작했다. 때문에 다른 유적조사와는 달리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자 준설작업은 중단되고 대신 문화재 연구소가 뛰어들었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1975년 3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2년간에 걸쳐 연못안과 주변 건물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였다.

필자는 발굴작업이 끝나고 복원 보존처리 작업이 한창일 때 연구소를 찾았다. 당시 연구소는 고고학자 조유전(趙由典)박사가 이끌고 있었다. 연구소의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월지의 규모가 전체면적 1만5천6백58㎡, 3개의 섬을 포함한 호안 석축 길이 1천2백85m. 이와 함께 3만여 점의 다양한 유물이 수습됐다. 연못 서쪽과 남쪽 각 건물지와 연결되는 유구에서는 건물터 26동, 담장터 8개소, 배수로시설 2개소, 입수구 시설 1개소가 확인됐다. 발굴작업에 소요된 연인원 6만4천9백82명,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발굴조사였다.

자칫 중장비에 깔려 영원히 묻힐뻔 했던 월지 발굴은 후일 ‘유적이 분포돼 있는 지역의 건설 공사에는 반드시 사전 유적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는 선례를 남겼다.

▶ 당나라 궁내의 태액지

월지는 당나라의 대명궁과 백제의 궁남지를 보고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문무왕을 비롯해 많은 신라인들이 전쟁 과정에서 백제, 고구려, 당나라의 궁전을 많이 보게 되었고 그들의 문화를 상당 수준 접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대명궁은 당나라 3백년 수도였던 장안성(長安城) 내의 궁정에 속한 건물로 남북 2.6㎞, 동서 1.5㎞ 로 그 규모가 대단하다. 태종 8년(634년)에 만든 이 궁 안에는 태액지(太液池)라는 못이 있는데 이 못 속에 신선이 산다는 삼선도를 만들고 신성을 뜻하는 봉래산이라 불렀다. 못가에는 태액정을 지어 왕의 휴식처로 삼았다.

한초(漢初.기원전 206~서기 8년)에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도가사상(道家思想)이 일었다. 제후들은 불로장생을 구한다는 염원에서 궁 안에 못을 파고 동해의 신선이 산다는 영주, 봉래, 방장(瀛州, 蓬萊, 方丈)의 3섬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양식은 당(唐)까지 이어졌다.

▶ 조경기술 발달했던 백제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조경술이 발달했다.

진사왕 7년(391년)1월, 궁궐을 중수하고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기이한 꽃과 짐승을 길렀다. 무왕 35년(634년) 3월에는 궁의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끌어 들이고 버드나무를 심었다. 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방장 선산을 모방했다. 무왕 39년 3월에는 왕과 왕비가 이 못에서 뱃놀이를 했다. 의자왕 15년(655년) 12월에는 궁 남쪽에 망해정을 짓고 태자궁을 사치스럽게 지었다-《삼국사기》

위에 기술된 연못이 백제 무왕(武王)의 출생 설화와 관련된 부여 궁남지(宮南池)다. 경주의 월지보다 40년 앞섰다. 이러한 백제의 뛰어난 조경술은 일본에도 전해졌다. 일본서기 ‘스이꼬 천황(推古天皇)조’에는 “백제의 노자공이란 사람이 궁실 남쪽 뜰에 수미산을 꾸미고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는 이 같은 주변국들의 문화를 흡수해 월지를 만들고 중국의 무산(巫山) 12봉을 모델로 삼았다. 무산 12봉은 중국 양자강 상류 삼협에 있다.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1~256년) 초(楚)나라 양(襄)왕이 ‘꿈속에서 선녀와 노닐었다’ 는 고사가 병풍산수화로 그려 질 정도로 경치가 빼어난 곳. 당나라 시인 이태백(李太白)은 삼국지의 주 무대인 이곳을 3번이나 찾아가 무산 12봉의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서 노래하기도 했다. 이 무산 12봉을 모델로 한 경주 월지는 못 가운데 삼신산을 만들고 불로초가 있다는 동해를 상징했으며 못 서편에는 임해전이란 동궁을 세웠다.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읊조리며 향연을 베풀었던 임해전. 쓰러져 가는 왕조의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들어 가 삼베옷에 초근목피하다 생을 마감한 마의태자(麻衣太子)의 눈물과 한이 고인 월지. 지금 찬란한 영화는 간데없고 휘황한 못가에 쓸쓸하게 서있는 주춧돌만이 그날의 비운을 전해주고 있다.

최근 월지의 야경은 빛 예술과 어우러져 사진작가들의 명소가 되고 있다
최근 월지의 야경은 빛 예술과 어우러져 사진작가들의 명소가 되고 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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