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컷(IMDB 제공)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유태인 학살과 관련된 참상을 영화화한 작품은 수도 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을 작품을 선택하라면 나는 <쉰들러 리스트, >와 이 영화 <소피의 선택>을 내놓고 싶다.

전자가 전쟁을 이용해 돈을 벌던 한 사업가가 유태인 학살을 목도하고 자신의 기업활동을 이용하여 유태인들을 구해낸 실제 인물을 그렸다면, 이 영화는 나찌의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간 한 가족이 겪는 천인공노할 비극을 다룬 수작이다. 특히 자신의 아들딸의 생사를 결정하라는 악마같은 수용소장의 지시에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적나나하게 보여준다.

그 어머니를 연기한 메릴 스트립. 상업영화 최고의 영예인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21번이나 올라 그 중 세 번을 수상한 여배우, 비평가들 사이에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배우”로 인정받는 연기의 천재, 메릴 스트립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메인 사회라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메릴의 이야기를 꺼낸다. 어쩌면 그녀가 후보로 오르지 못한 시상식이 뉴스가 될 정도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오만함이나 경박함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시상식 객석 맨 앞자리에 남편과 함께 앉아서 다른 배우들이 상을 받을 때마다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는 그녀의 자태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501 영화배우 - 마로니에 북스>의 소개를 빌리자면... 스트립은 전형적인 이스트코스트 사람(미국의 동부 해안지역인 뉴잉글랜드 지방을 일컫는 말로 유럽인다운 고전적인 백인 가정을 뜻하기도 한다)으로 성장해 한때 오페라 가수를 꿈꿨다가, 바사 칼리지와 예일 대학을 거쳐 마치 운명처럼 배우가 되었다. 억양과 사투리를 흉내 내는 거의 로봇 같은 재주를 타고났고 의상과 분장만으로도 완전히 달라진 외양을 연출할 수 있는 그녀가 일구어 내는 노력들의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다. 사실상, 그녀의 연기를 묘사하는 데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하게 비판적인 말은 기계 같다는 것이다. 스트립이 연기라는 '생산품'을 찍어 내는 듯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순전히 그녀가 마치 컴퓨터로 디자인이라도 한 것처럼 매 연기마다 새로운 스타일의 화법와 정서적 태도를 만들어 보여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준비를 덜 한 것이 아주 좋을 때도 있다. 그러면 두려움이 스며들고 두려움은 큰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는 말에서 그녀의 연기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메릴 스트립이 헐리웃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77년 <줄리아>에서의 작은 역과 <디어 헌터, 1978>에서 베트남 전쟁으로 피폐해진 시골 마을의 처녀 역을 맡으면서부터다. 그녀는 이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1979>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고 3년 뒤 <소피의 선택>으로 대망의 오스카 주연상을 거머쥔다. <철의 여인>에서 영국 대처 수상 역으로 오스카를 탄 메릴은 과거 대배우 캐서린 헵번의 뒤를 이어 세 개의 오스카를 간직한 배우가 된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전후 유태인의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중 하나다. <쉰들러 리스트>나 비슷한 영화들처럼 유태인 대학살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나찌의 비인간적인 광기의 희생양이 된 한 엄마의 고통을 다룬 작품이다. 메릴 스트립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아픈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방황과 고통의 나날 속에 육체의 쾌락을 탐닉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운의 여인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수많은 영욕의 순간을 한 얼굴로 그려내는 그녀의 표정을 보노라면, “최고의 연기”라는 찬사마저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로 동화되는 자신을 느낀다. 메릴 스트립은 마지막 씬 (그녀의 선택) 촬영을 단 한 번의 테이크로 끝내고, 엄마로서 너무 고통스럽고 감정적으로 탈진되는 것을 느꼈기에 다시 촬영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스트립은 또 1986년 오프라 윈프리쇼에 출연했는데 그 장면이 소개되었다. 그녀는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장면이 흘러나오자 매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처음에 그녀는 배역을 따기 위해 알란 파큘라 감독에게 그야말로 무릎꿇고 빌었다고 한다. 파큘라 감독은 처음에 소피 역에 스웨덴 출신 여배우 리브 울만을 기용하려고 생각했고 나탈리 우드를 고려하기도 했다. 마르타 켈러와 바브라 스트라이즌드도 강력하게 배역을 원했지만 마지막에 알란 감독은 메릴의 손을 들어주었다.

캐스팅된 후 메릴 스트립은 소피를 연기하기 위해 폴란드 액센트를 배웠을 뿐 아니라 폴란드 난민의 정확한 액센트를 갖기 위해 독일어와 폴란드어를 말하는 방법도 배웠다고 한다. 메릴 스트립의 소피 연기는 ‘신이 내린 연기’라는 극찬을 받으면서 영화잡지 프리미어지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0대 연기’ 중 3위에 랭크되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 1988>의 작가이자 기획, 주연까지 맡았던 영국 배우 존 클리즈는 이 영화를 보고 케빈 클라인을 자신의 영화에 출연시키기로 작심했다고 한다.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는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18금 코미디 영화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최우수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감독상과 각본상은 아깝게 놓쳤지만 한국영화 최초의 수상 소식에 모두들 내 일처럼 반가워했다. 봉준호 감독의 개인적 영예이기도 하지만 이제 우리 영화시장이 미국이 추켜세울 만큼 성장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봉 감독이 지역영화제라고 폄훼하기도 했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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