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아 시인·문학평론가

우리는 늘 거울과 마주친다. 집안에서도 집밖에서도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내 매무새와 얼굴을 본다. 그런데 거울 속의 저 얼굴이 내 얼굴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언제부터 거울 속의 내가 ‘나’ 자신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일까? 거울의 기원은 ‘물’이다. 만물의 근원인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 가운데 사물을 되비추어 보이는 유일한 질료인 ‘물’. 인류의 먼 조상은 물을 들여다본 기억을 통해 거울이라는 사물을 만들어내었다.

그렇다면 맨 처음 물속에서 자기 얼굴을 본 사람은 그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어떻게 알아챌 수 있었을까? 고인물의 표면이 사물의 영상을 반사해준다는, 지금은 너무도 당연시되는 사실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던 그때, 사람들은 물속의 얼굴이 어떻게 자신의 것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걸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그 비밀의 단서를 제공해준다.

처음 나르키소스는 물속의 얼굴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물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 그 얼굴 위로 구름이 지나가고, 은빛물고기들이 물풀을 헤치며 사랑을 나누는 풍경이 있었을 것이다. 그 얼굴의 희고 푸른 이마와 아름다운 눈썹이 바람에 하르르 지워졌다가 다시 나타날 때마다 나르키소스는 안타까워 수척해졌을 것이다.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손 내밀면 흩어져버리는 아름다운 얼굴을 애달프게 바라보다가 나르키소스는 문득 깨달았을 것이다.
‘저 얼굴이 내 얼굴이다!’ 그토록 오래 누군가를 사랑하여 마침내 자신을 깨달은 나르키소스는 결국 죽음을 통해 자신을 완성시켰다. 사람들은 여기에 이즘(ism)을 붙여서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고, 이를 도취적 ‘자기애’라고 말하곤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은 이 단계를 거울단계라고 한 바 있다. 거울단계는 생후 17-18개월 쯤 된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실제 자신을 동일시하는 단계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인(誤認)에 불과하다. 거울 속의 자신과 실재하는 자신은 동일하지 않다.

거울 속의 ‘나’는 나의 실재가 아니고, 본 모습이라고 할 수도 없다. 거울에 비친 나는 나의 겉모습, 그것도 일부일 뿐 전체가 아니다. 나는 내 뒷모습을 볼 수 없고, 정수리를 볼 수 없다. 어제, 아니 조금 전에 거울 앞에서 보았던 ‘나’는 지금 거울 앞에 있는 ‘나’와 다르고, 돌아선 나의 표정은 조금 전 나의 표정과 다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나를 확인할 수 있을까. 거울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이 타자라면, 나는 ‘타자’인 너에 의해서만 ‘나’를 확인할 수 있다. 타자는 나의 전체를 볼 수 있고, 타자만이 나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일 그 타자가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내 모습을 왜곡하여 설명한다면…?

나는 상상한다.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나’와 거울 속에 있는 ‘나’. 누가 진정한 나일까? 거울 속의 ‘나’인가, 화장하는 ‘나’인가? 거울 속의 ‘나’가 실재가 아니라면, 거울 밖에서 화장하는 ‘나’가 나인가? 이때의 나 또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원하고 숭배하는 미적가치에 따라 꾸미는 ‘나’ 아닌가. 나 자신을 위해 굳이 (거짓으로)꾸미거나 화장할 필요가 없다면, 꾸미는 일은 나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행위가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거울 속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저 사람은 누구일까?

우리는 누구도 자신을 볼 수 없다. 거울은 영원한 비밀을 가졌다. 비밀이 있다는 것은 감추어야 할 무엇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발견할 무엇을 지닌다는 것. 그것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구성하는 내 바깥의 타자들에 대한 발견이기도 하다. 하루에 한번, 고요 가운데 지극한 마음으로 거울과 마주해보는 것. 자신을 객관화하여 보는 것. 그리하여 찬찬히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것. 그 시간은 거울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김순아(시인 ‧ 문학평론가) ‖ 시집, 『슬픈 늑대』외 2권, 시론집 등 이외 저서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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