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시 물금읍 가촌서2길 14-13에 가면 송담서원이 있다. 송담 백수회 선생의 충의를 기리고자 1714년(숙종 40년)에 세워 1717년(숙종 43년)에 편액을 하사한 양산의 유일한 사액서원이다. 1574년(선조 7년)에 동면 사배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부여(扶餘), 호는 송담(松潭)이다. 10대 초반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장하였으나 학문을 배우고 행하는데 힘썼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19세 때 사배리 재실에서 글을 읽던 중 왜군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9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였지만 고국에 대한 충절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왜인을 감탄케 하였다.

송담 선생은 1696년에 양산 충렬사에 조영규군수와 함께 배향되었다가 문중에서 서원을 별도로 세워 그곳에 배향하였으며, 지금의 송담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5년에 가을에 사우를 중건(重建)하였다. 매년 3월 중정일에 유림이 향사(享祀)하고, 매년 음력 5월 20일에 후손이 제향(祭享)해오고 있다.

백수회 선생이 타계하고 28년이 지난 후인 1670년(현종 11년)에 나라에서 통정대부 호조참의라는 벼슬을 추증하였다.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을 가자(加資)라고 한다. 그래서 선생이 살았던 곳을 가자방(加資坊)이라 했고 그 가자방이 변해서 지금의 가촌리(佳村里)가 되었다. 일본에서 풀려난 후 물금읍 가촌에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백수회의 충의를 기려 당시 이곳을 백의사리(白義士里)라고도 불렀다.

일본에서 포로 시절 충절과 기개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며 이때 지은 가사나 한시들이 지금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왜적 우두머리가 백수회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라고 하자, 백수회는 도리어 적장을 꾸짖고 죽음을 무릅쓰며 저항하였다.

백수회는 자신의 왼쪽 팔뚝에 ‘영위이씨귀 부작견양신(寧爲李氏鬼 不作犬洋臣 차라리 이 씨의 귀신이 될 지언정 견양의 신하는 되지 않으리라)’이라는 글을 쪼아 새겼다. 적의 우두머리가 더욱 노하여 가마솥에 물을 끓여놓고 삶아 죽이겠다고 했다.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옷을 벗고 가마를 향해 가며 “이것은 내가 원하는 바이다.”하니 적의 또 다른 우두머리가 바삐 나와 말리면서 하는 말이 “이는 참으로 의사(義士)로다, 어찌 명분 없이 죽이리요” 하며 모두가 그 충절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도리어 적으로부터 존경을 받다가 포로가 된지 9년 만에 귀국하여 양산으로 돌아왔다.

백수회는 옳고 그름에 사리가 밝아 광해군의 난정으로 민심이 흉흉함을 보고 여러 번 상소하여 맹렬히 비판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후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후학 양성에 힘쓰며 칩거하다가 69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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