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시 교동에 위치한 충렬사는 호국선열인 삼조의열(박제상, 김원형, 조영규)과 임진왜란 공신, 독립유공자 등 총 67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영규(趙英圭) 양산군수는 본관이 직산이며 명종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7곳의 수령을 거쳐 양산군수로 부임해 임진왜란을 겪었다. 왜군이 밀려오자 경상병사 이각은 도망쳤으나 동래부사 송상현(정읍 출신)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조영규 양산군수는 양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조영규 양산군수는 1696년(숙종 22) 양산 충렬사에, 1709년(숙종 35) 동래 충렬별사(忠烈別祠)에, 1736년(영조 12) 동래 충렬사에 각각 모셔졌다. 숙종 때 조영규에게는 호조 참판을, 아들 조정로에게는 빙고 별검(氷庫別檢)을 각각 추증하였다. 조영규의 자는 옥첨(玉瞻)이며, 수의부위 준(準)의 아들로서 중종 30년(1535) 장성부 백암리에서 출생하였다. 

명종 6년(155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초관을 거쳐 사복시 주부, 판관이 되고 이어 제주판관, 무장현감을 지냈다. 부친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가 영암, 용천, 낙안, 영해 등의 수령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년에 양산군수로 부임하였다. 직산 조씨는 고려말에 장성군 북일면 누태마을로 입향했다가 조영규 군수의 조부 때 북이면 백암으로 옮겨 살았다. 

1667년(현종 8)에 이르러 장성 사람들이 조영규 부자를 모암 서원(慕巖書院)에 모시고, 2년 후 송준길(宋浚吉)이 왕에게 조영규 부자의 충효를 아룀으로써 정려(旌閭)를 명하고 충효 양문(兩門)을 세우게 하였다.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방장로 655 (백암리)에 있는 조영규 정려(趙英圭 旌閭)는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1985년 2월 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다. 조영규 양산군수는 충과 효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산진성, 동래성을 공격하자 조영규 양산군수는 군사를 이끌고 말을 달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찾아가 생사를 같이하기로 기약하였다. 조영규 양산군수는 죽음뿐임을 뻔히 알면서도 필마단기로 노모에게 하직 인사를 고하기 위해 양산으로 돌아왔다. 인사 후 아들 조정로(趙廷老)에게 할머니를 잘 모시고 고향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 후 조영규는 동래읍성으로 돌아와 동래성 북문으로 치달으며 성을 포위하고 있는 왜병들을 노호 질타하면서 성문 앞 가까이 이르자 왜병들도 감복하여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송상현 부사를 도와 힘껏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아들 조정로는 할머니와 함께 한 달이 넘도록 걸어서 고향인 장성에 도착하여 할머니를 모셨다. 머리를 풀고 걸어서 동래에 이르니 온 성에 시체가 쌓여 가득하므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초혼(招魂)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허장(虛葬 : 시신 없는 무덤 조성)하였다. 조정로는 적과 함께 하늘을 같이할 수가 없어 한 개의 토실(土室)을 지어 문을 닫고 20년을 애모(哀慕)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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