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통신시설이었던 봉수대는 평상시에는 일거(一炬),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이거(二炬), 왜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거나 적이 변경에 가까이 오면 삼거(三炬), 우리 변선과 접전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사거(四炬), 왜적이 상륙하거나 적과 접전하면 오거(五炬)로 홰를 올리는데 변경에서부터 순차적으로 한양으로 연락했다. 

안개, 구름, 비, 바람 등으로 봉수의 전달이 불가능할 때에는 포성이나 뿔 나팔, 징 등으로 알리고 여의치 않을 경우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알리기도 했다. 부산의 다대포에 왜적이 나타났을 때 한양까지 정보를 알리는데 38곳의 봉수대를 거쳐 약 12시간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부산지방에는 계명산, 황령산, 간비오산, 구봉, 오해야, 응봉, 석성 봉수대 등 일곱 곳에 봉수대가 있었다. 그중 오해야 봉수대는 영조 때 폐지됐고 석성 봉수대는 현종 때 구봉에 합쳐져 폐지됐으며 나머지 5개소가 영조 이후에도 계속 존치됐다.
 부산에 있었던 7개의 봉수대 가운데 금정산 유일의 봉수대인 계명봉수대 터는 정상이 아니라 동남쪽으로 약 1㎞ 떨어진 504m봉에 있다. 계명봉에서는 고당봉, 원효봉, 원효석대, 의상대, 무명암, 의상봉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요지다. 금정산에 자리 잡은 범어사, 청련암, 내원암, 대성암, 금강암, 원효암 등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봉수대가 산 정상에 위치하면 원거리까지 잘 보이지만 이곳에 근무하는 군졸들이 오르내리기 불편하므로 사방이 잘 보이는 적당한 위치에 설치하였다. 위치선정에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부산 계명산, 양산 원적산 봉수대는 경부고속도로 노선과 비슷하다.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1450년) 4월 16일에 경상도 좌도 처치사(慶尙道左道處置使)가 물지기의 혁파를 요청한 내용이 나온다. 경상도 좌도 처치사가 아뢰기를, "연해(沿海)의 육수(陸水 : 민물)가 서로 통하는 곳에 감고(監考) 1명과 군인(軍人) 5명을 정하여 도적의 변고를 망보게 하고는 이를 '수직(水直 : 물지기)'이라고 일컫고 있지만, 그러나 왜적(倭賊)이 몰래 오게 되면 반드시 그들에게 사로잡히게 되니, 청컨대 바닷가의 경주(慶州), 울산(蔚山), 장기의 지경에 연대(煙臺)를 높이 쌓아서 해적(海賊)을 망보게 하고는 물지기를 없애서 그 폐단을 혁파(革罷)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연대(煙臺)는 조선조 세종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경 지대에 설치한 봉수대(烽燧臺)로 그 모양은 사각형으로 쌓아 올렸는데, 높이가 30척(尺), 빗변 한 변의 길이가 20척(尺)이며, 그 바깥에 해자(垓字)를 파고 목익(나무 말뚝)을 여러 겹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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