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꼭 어젯일 같은데 어느새 불혹(不惑)의 나이가 되었다. 
1979년 그 때 열 살이었던 소년은 50세의 장년이 되었고, 20세의 청년은 환갑의 문턱에 서 있다는 말이다.

역사란 묘한 것이다.
소가 밟아도 깨질 것 같지 않던 유신체제, 18년 군사독재의 화신 유신의 몸통을 사살할 꿈을, 누가 감히 꿀 수 있었을까. 

권력의 제2인자, 유신체제를 수호하고 대통령의 목숨을 철통처럼 경비해야 할 심복중의 심복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유신체제가 종언을 고했다.

그 해 10월 16일에서 20일까지 부산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을, 우리 현대사에서 민중의식 자주의식이 집단적으로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의식화 과정의 한 분수령을 이룬다.

1965년 한일협정체결이후, 미국이 직접 챙기고 작용 조종하던 한국관리체계의 여러 분야들이, 일본의 소관으로 넘어가면서 '사꾸라'라는 은어(隱語)가 세상을 아리송하고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미국자본이 한발 옆으로 비껴서고, 일본의 매판자본이 물밀 듯이 현해탄을 건너면서 생긴 말인데, 경제계 보다는 외려 친일파들이 우글거리는 정치계에 유행병처럼 번져나는 말이었다.

'사꾸라'는 가짜 밀정(프락치), 첩자(스파이)를 가리키는 말로,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에 포섭된 유신시대의 야당 당수들에게 붙여진 말이기도 했다. 

사꾸라 당수노릇을 거부했던 김영삼 야당총재가 YH여공 신민당사 농성을 비호한 탓으로, 국회의원직 제명처리가 변칙적으로 강제 감행되었다.

그러잖아도 박정희 군사정권의 횡포와 불법적 장기집권에 넌덜머리를 내던 국민들의 반정부 반독재 기류가 폭발일보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때마침 김영삼 총재에 대한 폭압적 불법탄압은, 부산 마산지역 저항적 민중정서에 불을 질렀다. 특히 마산은 자유당정권의 3.15 부정선거 획책에 반기를 들고 분연히 떨쳐나섰던 민중봉기의 선도적 진원지였다.

애초에 '維新(유신)'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일제가 1858년에 단행한 봉건혁파 개혁개방 정책을 維新이라 했다. 

아무리 뼛속까지 외세의존 친일파이고 일본군대에서 잔뼈가 굵었다지만, 고양이도 낯짝이 있고 체면이 있지, 일제의 용어를 그대로 본떠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혈서로 '한번 죽어 충성을 일왕(日王)께 맹세한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인다운' 다가끼 마사오(高木政雄) 중위다운 선택이었다.

10월 18일 부산에는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있어서 마산 창원에도 위수령이 선포되었다.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전개되었으나, 항쟁의 불길은 서울, 광주, 대구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부마항쟁은 암흑의 유신시대를 마감하고 민중승리의 새 시대를 열었다.
역사는 공정하고 냉엄하다. 독재자 박정희의 비참한 최후는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월남의 고딘디엠과 같은 유형에 속한다. 
이 모두가 미국의 후진국 대리통치 경영의 희생물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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