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언론공화국이라 해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언론이 탄압을 받던 시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그동안 발매배포금지, 압수, 기사삭제, 일주일 정간처분, 2개월 정간, 무기정간처분을 되풀이 하던 총독부의 언론탄압이, 태평양전쟁 시기엔 아예 폐간처분으로 신문사들이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동아일보는 1920년 11월 일본군의 만주 거주 조선인 대량학살사건 취재차 훈춘(塤春)에 특파된 장덕준 기자의 희생을 겪었다.

1936년 8월에는 세계신기록으로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 버린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4번째의 무기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민족의 대변지를 자처하고 나선 조선일보 역시 30여 차례의 기사압수 처분에, 강우규 의사 사형선고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죄로 조선신문 최초로 정간처분을 연이어 두 번씩이나 받았다.

'골수에 맺힌 조선인의 한' 이란 기사를 연재하다가 계속 네 차례의 정간처분을 받기도 했다.

이런 탄압은 대한민국정부 자유당시절에도 있었다. 자유당시절 언론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는 경향신문(京鄕新聞)의 폐간이었다. 이때만 해도 한국의 대형신문들은 민중의 시각에서 독재 권력을 비판하고 언론의 정도를 걸을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일제하에서 민족을 배반하고 친일을 했던 쓰라린 경험이 잠시 그들을 반성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고만장하고 천하를 삼킬 것 같던 일본제국의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기세가, 하루아침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허무와 공포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의 군사정권시절에는 대형언론의 편향이 두 갈래로 양분되는 현상을 보였다. 한쪽은 박정희 군사정권에 거리들 두고 뜨악해 하는 논조를 보였고, 또 다른 한쪽은 박정희의 반공 팟쇼 노선에 빌붙는 태도를 보였다.

박정희 군사통치에 거리를 두고 뜨악해 하는 언론사측도 그 사주(社主)와 경영진은 권력에 붙고 싶고 박정희의 은전(恩典)을 입고 싶었지만, 구각을 깨뜨리고 역사현실의 모순을 혁파한 4.19혁명의 환희를 맛본 4.19, 6.3세대가 주축인 말단 기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언론환경에서 수많은 젊은 기자들은 이에 반기를 들고 신문사를 쫓겨나, 거리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권력에 굴종하여 자신들의 선친세대가 누렸던 부와 기득권을 지켜가려는 사주와 경영진과는 도저히 한솥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중앙정보부가 파견한 '조정관'들이 언론사에 상주하는 언론환경에서 양심을 가진 젊은 기자들의 갈 길은 빤한 것이었다. 독재 권력이나 군사통치의 비호아래 몸집이 굵어진, 그야말로 지금은 재벌언론사가 되었다.

오죽하면 입법, 사법, 행정부위에 언론권력이 군림한다는 말이 생겼을까? 어떤 대형언론사는 군사통치 권력과 아주 더러운 거래를 하고 있다는 설이 이미 70년대에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다. 요즘도 부끄러운 성 스캔들이 대형언론사 주위를 맴돈다.

우리시대의 대형언론사, 그들의 선친세대가 언론경영을 시작할 때에 내세운 사시(社是)나 사훈(社訓)은, 정의옹호, 불편부당,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 민주주의지지, 문화주의를 제창한다, 등이었다. 정론직필(正論直筆)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었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대형언론사들은 최소한의 정론직필도 외면한다. 그들 선친세대가 내세운 사시나 사훈은 이미 어디론가 내팽개쳐 버린지 오래다. 광고지면을 최대한 늘리고 부정한 방법으로 독자를 유혹 신문부수 늘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오직 돈벌이, 회사 재산불리는 일에만 몰입 올인 한다.
나라가 망하건 민족이 없어지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재벌언론의 지위와 권력을 누리고

특권층으로 갑질 노릇을 하며 살면 되는 것이다. 자기회사에 이익을 주는 권력과는 유착을 하고 그렇잖은 정부에는 적대시 한다. 민족 언론을 표방한 초창기의 창립정신을 버리고, 친일 친미 외세의존 사대매국언론으로 사회를 오도, 패악을 끼치고, 통일방해 반민족 언어폭력으로 횡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양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