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박상진 의사는 1884년 12월 7일 울산시 송정동에서 출생했고 호는 고헌(固軒), 승지 박시규의 아들로, 큰아버지인 교리 박시룡에게 입양되었다. 경주 최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02년부터는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 판사로 있던 허위(許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4년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해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독립운동가로는 대한민국 최초의 법조인이었다.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해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로 삼았고, 항일무장단체인 광복회를 조직했다. 전답을 저당 잡혀 빌린 자금으로 곡물상회로 위장한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었다. 1915년 1월 안일암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다. 7월에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의 인사와 합작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와 만주 각지에 조직을 둔 1910년대 국내 최대의 독립군 단체로 성장하였다. 박상진은 곳곳에 곡물상을 설립해 연락 거점으로 삼았으며, 일제 타도를 추진하는 행동 강령으로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을 내렸다.

1915년 우편마차에서 세금 8,700원을 탈취하여 군자금을 확보하였고, 친일부호에게 독립자금을 강제모금하였으며, 협조하지 않으면 처단하였다. 광복회원을 시켜 칠곡부호 장승원, 충남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게 하였다. 투쟁 중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투옥되었으며, 사형선고를 받았고, 1921년 8월 11일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돼 38세 나이로 순국했다.

박상진 의사의 생가는 LH공사의 송정택지조성지구에 포함되어 역사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울산시가 LH가 조성 중인 송정택지개발지구 조성사업에 근린공원 조성을 조건으로 허가를 내줬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는데, 이는 3등급에 해당한다. 박 의사의 서훈 등급을 올리자는 시민운동이 울산에서 벌어져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비하여 양산 출신 윤현진 독립투사의 생가는 상북면 내전마을에 있지만 난개발로 공장에 둘러싸여 복원을 포기하였다. 울산광역시의 독립투사 생가보존 시책과 대비된다. 양산출신 이규홍 독립투사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그동안 양산시의 무관심으로 손자 이경우 씨가 고군분투해왔다. 최근 양산시의회의 서훈촉구 정부 건의문 채택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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