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임시정부에서 양산을 대표하는 독립투사는 우산 윤현진 선생(1892~1921)과 백농 이규홍 선생(1893~1939)이 있다. 두 분은 양산 출신의 위대한 인물인 동시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립투사들이다. 윤현진 독립투사는 상해 망명 후 임시정부 재무차장을 맡아 2년 정도 활동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필자는 김구 선생과 이규홍 선생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하여 최초로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를 분석하여 양산 출신의 독립투사 윤현진 선생, 이규홍 선생 이름을 발견하였다. 윤현진 선생 이름이 『백범일지』 상권에 먼저 나온다. 이어서 이규홍 선생의 이름이 상권과 하권에 나온다. 백범일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제1대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 홍면희(나중에 홍진)가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내각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김구 선생은 의정원의 정식 절차를 밟아서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필자 보충 설명 : 윤기섭 내무장, 오영선 군무장, 김갑 재무장, 김철 법무장, 이규홍 외무장-외무부장관) 등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번번이 곤란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얻었다. 나는 국무위원의 주석이 될 뿐이요, 모든 국무위원은 권리에나 책임에나 평등이었다. 그리고 주석은 위원들이 번차례로 할 수 있으므로 매우 편리하여 종래의 모든 분리를 일소할 수가 있었다.

『상해한인사회사: 1910~1945』를 쓴 쑨커즈(孫科志) 푸단(復旦)대 교수에 따르면, 1919년 말 경 상하이에 있던 한인은 남자 362명, 여자 326명으로 합계 688명이었다. 1920년대 상하이 거주 한인들의 절반은 직업적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나머지 한인들은 교사, 공무원, 회사원, 노동자, 선원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해의 독립운동가는 줄어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활동이 점점 힘들게 되었지만 백농 이규홍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무려 16년간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차관, 장관,의정원 부의장, 헌법 제정 위원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위대한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은 하루빨리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만 한다.

저작권자 © 양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