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 외무총장, 의정원 부의장 등 요직을 역임한 이규홍 선생이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1945년 10월 민심사 출판국에서 출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용'에 보면 내무부 총장 이동녕, 차장 결(缺), 전임차장 이규홍, 각도 대의사(代議士) 중 경상도에는 윤현진, 이규홍이 나온다.

일본인 시각에서 본 이규홍 독립투사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대정(1920년) 9년 6월 29일 국외정보(상해 파견원 보고 요지)로 '상해임시정부와 철혈단에 관한 건' 제목으로 내각총리대신, 각 성 대신, 척식국 장관, 경시총감, 검사총장, 조선군사령관, 조선 양(兩) 사단장, 조선 헌병대 사령관, 진해 요항부 사령관, 관동장관, 관동군 사령관에게 보낸 내용에 이규홍 선생이 언급되고 있다. '이에 이동휘(李東輝) 지난 20일 국무총리를 그만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령(露領)으로 가고자 하였고, 내무부 차장 이규홍(李圭洪)도 사직을 신청하였다는 정보가 있다. 또한 안창호는 선후책에 고심하며 철혈단 간부와 화목하게 지내고자 그 중개자 역할에 힘을 쏟은 것을 울면서 일반인에게 하소연하였다.'

대정 13년(1924년) 12월 27일 재상해 총영사 야이다 나나타로(矢田七太郞)가 외무대신 남작 하라요시 쥬타로(原喜重郞)에게 보내는 공문 '참칭 임시정부 간부경질에 관한 건'에 보면 이규홍 독립투사가 나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지역 불령(不逞 : 불만을 품고 제멋대로 행동함)한 조선인 때문에 금지되어 있던 …(원본 판독 불가)…임시정부 간부에게 동요가 일어난 건에 관하여는 이미 보고한 바와 같고, 본 월 11일 이동녕(李東寧)이 인책으로 사직하자 이 지역 불령한 조선인들은 이를 이동녕 1인 책임으로 돌리지 아니하고 당원 전부의 책임이라면 전부 총사직을 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 김구 이하 당원은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제출하여 총사직하게 되었다. 국무총리로 박은식(朴殷植)이 임명되었고, 다음과 같이 조직, 본월 16일 의정원(議政院)의 동의를 얻었다. 

…원본 판독불가… 하기(下記 : 아래와 같다.) 국무총리 박은식 내무총장 이유필(李裕弼) 00총장 이규홍, 00총장 노백린(盧伯麟), 법무총장 000….원본판독불가… 이규홍 선생은 무슨 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명칭은 나오지 않는다. 

이승만 임시대통령 탄핵문제는 1925년 3월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임시의정원에 상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3월 13일 곽헌, 최석순, 문일민, 고준택 등이 안을 상정한 것이다. 심판서가 3월 21일 제출되고, 23일 임시의정원은 이를 통과시켰다. 이승만 탄핵안이 통과된 그 자리에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그 결과 12월 말부터 임시대통령직을 맡아 개헌의 중심축에 서 있던 박은식을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리고 다음 날 24일 박은식은 제2대 임시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신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바로 내각을 구성했다. 후임 국무총리에 군무총장 노백린을 뽑고, 나머지 각료를 유임시키는 '국무원 동의요구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통과시킨 것이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박은식 임시대통령, 노백린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 이유필 내무총장 노동국총판 겸임, 오영선 법무총장, 조상섭 학무총장 교통총장 겸임, 이규홍 재무총장 외무총장 겸임.

1926년 12월 9일 홍진이 국무령에서 물러났다. 11월 24일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은 내무부총장을 맡아오던 김구에게 국무령직을 권했다. 김구는 1926년 12월 10일 국무령에 선임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가장 먼저 내각을 구성하고 나섰다. 여기에는 오랫동안 상해에서 함께 고난을 이겨온 청년들이 자리를 잡았다.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 등이 그들이다. 김구 국무령, 윤기섭 내무장, 이규홍 외무장, 오영선 군무장, 김갑 재무장, 김 철 법무장. 이규홍 독립투사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주요 요직인 각부 장관, 차관, 대의사 등을 맡아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하루빨리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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