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선생 `훈민정음`을 `한글`으로 명칭
항상 한글연구 자료를 들고 다녀 `주보따리`란 별명을.

사진: 대한제국 고종황제
사진: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에 창간한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만을 사용한 최초의 신문이다. 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은 현재까지 [신문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사진: 처음으로 우리말과 글의 문법체계를 세운 한글의 아버지 주시경(1876-1914)은 북으로 간 김두봉과 남한의 최현배, 김윤경 등 많은 국어학자들을 배출했다.

 고종 32권, 31년 11월 21일(계사), 칙령 제1호에서 제8호까지에서 다시 공문식을 내린다. 제1호, 내가 재가한 공문 식제를 반포하게 하고, 종전의 공문 반포 규례는 오늘부터 폐지하며 승선원 공사청도 아울러 없애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제1, 공문식, 제14조, 법률칙령은 모두 국문(國文)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漢文)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으로 혼동한다.
 고종 33권, 32년 5월 8일(무인), 공문식을 반포하다.
 제1장 : 반포식(頒布式)
 제9조 법률, 명령은 국문을 기본을 삼고 한문번역을 첨부하며 혹은 국한문(國漢文)을 섞어 쓴다.]
 -고종, [한국근대사기초자료집],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약 450년 뒤인 1894년(고종 31) 11월 21일에 한글이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가 된다. 고종은 칙령을 내려 법률과 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하거나 혹은 국한문을 섞어 쓸 것을 규정했다. 공문서를 기본적으로 한글로 작성하고 필요에 따라 한문 번역을 덧붙이는 형식인데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홍범 14조에 한글, 한문, 국한 혼용문의 세 가지로 작성하여 한글 본위로 된 공문서를 작성한다는 원칙을 발표했다.
 한글은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널리 쓰였으나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동안 언문(諺文)이라 불리며 상말이나 적는 저급한 글이라 천시되어 오던 한글이 국가가 인정하는 나라국문이 되어 500년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쓰이게 됐다.
 상말을 적는 문자로 천시되어 일반 백성들에게는 쓰였으나 공식적인 인정은 받지 못하고 안방 아녀자들이나 상민이나 하는 식으로 폄하했던 언문이 고종의 칙령에 의해 이때부터 한글이 국가가 인정한 국문이 되어 500년 조선 역사상 처음 공식문서화한 것이다. 
 고종의 칙령으로 한글은 `우리글`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1순위가 국문이고 한문 번역과 국한문은 그 다음임을 천명한 것이다. 고종 칙령 제 1순위가 국문이고 한문 번역본과 국한문체는 그 다음임을 분명히 천명한 한글은 완전한 `우리글`임에도 신문과 공문서는 대부분 국한문이 혼용된 형식으로 작성되어 한문과 국한 혼용문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근대지식인들 조차도 한글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국어의 규범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였다. 당시 한글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자기 주관에 따라 소리 나는 대로 우리말을 썼다. 한글이 소리를 잘 표현하지만 공인된 철자법이 존재하지 않아 같은 말을 한글로 적더라도 사람마다 표기가 달랐던 것이다.
 한글이라면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에만 쏠려 별로 주목하지 못한 인물들이 있다. 바로 현대 한국어와 한글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주시경과 그의 수제자인 김두봉과 최현배 등이다.  
 이때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 신문이 [독립신문]이다. 이 신문은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창간하며 주시경을 편집기자 겸 교열기자로 채용했다. 신학문을 배우며 국어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주시경은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운명이었다. 그는 신문사 안에서 한글 연구를 목적으로 만든 최초의 `국어연구회`를 만들어 국어문법과 한글 표기법연구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서재필의 국민 계몽운동을 지원하면서 한글전용, 한글 띄어쓰기, 쉬운 국어 쓰기를 실천했다. 이처럼 우리 국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주시경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던 해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까지 서른아홉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노력으로 오늘날 우리가 아름다운 한글을 쓰게 된 것이다. 
 주시경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1876년, 상주 주씨 주세붕의 후예로 황해도 평산군에서 훈장을 하던 아버지 학원(鶴苑)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상호(相鎬)이고, 호는 순 한글의 한 힌샘이다. 가난한 훈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세 되던 1889년에 큰아버지 양자가 되어 서울로 왔다. 
 그는 1894년 9월에 배재학당 특별과에 입학했다. 그때 남대문시장에서 해륙물산상회를 운영하던 양아버지를 돕다가 탁지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제물포 이운학교 속성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마산으로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학교와 지사가 폐지되자 1896년 4월 배재학당에 재입학을 하여 1898년에 역사지지 특별과를 졸업하고, 1900년에 보통과를 졸업했다. 
 주시경이 처음 한글연구에 뜻을 두게 된 계기는 1892부터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때 먼저 한자음대로 읽고 다시 그 뜻을 우리말로 해석하는 것을 보고, 처음부터 우리말로 적으면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 그 이유였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시작된 국어연구는 최현배와 김두봉 이라는 국어학자들을 낳게 한 것이다. 그가 1914년 갑자기 돌아간 후에도 그 제자들은 국어교재를 편찬하고 더 많은 국어교사를 양성해냈다. 
 주시경이 살았던 시대는 격동의 시기였다. 개항 후 조선은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져있었다. 조선에 대한 세계열강들의 야욕은 조선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고 결국에는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뺏기는 치욕의 시대를 불러왔다.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해인 1876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서당 훈장의 아들로 한문 교육을 받았지만, 엄연히 훈민정음이라는 우리 고유의 글자가 있음에도 아이들이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려운 한문을 배운다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러던 주시경은 젊은 청년들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한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뒤 격동기시대 강대국들이 모두 자신들만의 글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후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국어국문학자로 활동하던 주시경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1864-1951)을 만나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대한제국 자주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그의 대표적인 운동으로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구성한 등의 일이었다. 주시경은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그가 만든 [독립신문]에 몸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주시경은 대한제국을 근대화로 자주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서재필의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 본격적으로 자주독립 운동을 하게 된다.
 서재필이 망명한 뒤에도 여러 잡지에 논설을 실어 외세의 저항하자는 운동을 펼쳤고, 이화, 숙명, 오성, 기호, 배재학당 등 수많은 학교를 오가며 학생들에게 우리의 언어, 글자, 역사, 문화를 가르쳤다. 항상 책보따리를 들고 다녀 `주보따리`란 별명이 붙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이런 운동은 계속됐다.
 개항과 식민지화 속에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보급함으로써 국민을 계몽하고 나라의 자강과 독립을 도모하려 한 한글학자이다. 그의 노력은 그의 사후 제자들을 통해 계승되어 현재까지도 남북 한글 체제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신학문의 중심지였던 배재학당에서의 경험은 주시경의 이후 활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영문법을 공부하며 언어학의 이론을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세계지리와 역사를 가르치던 서재필이 주도한 협성회와 독립협회에 참여하며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협성회는 배재학당의 학생단체로 매주 시국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했는데, 주시경은 한글로 된 [협성회회보]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의 교정과 편집을 맡았다. 1896년에는 신문의 한글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한글을 전용화하고 맞춤법을 제정할 것을 주장하는 등 국어연구를 본격화했다. 
 배재학당 졸업 후에는 여러 신식 학교들에서 국어 및 역사, 지리, 수리 등을 가르쳤고, 1900년에는 토지 측량을, 그리고 1906년부터 3년간은 세운 정리사(精理舍)에서 수학과 물리를 배우는 등 이과계통의 학문을 수학하였다. 이러한 자연과학적 학문 방법을 익힌 것이 주시경이 분석적으로 국어를 연구한 배경이 되었다. 
 1907년에는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같은 해 7월부터는 지금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학부에 설치된 국문연구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국문연구소는 국문의 원리와 연혁, 현재의 상태와 장래의 발전 방법 등 한글 전반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 단체로, 우리말을 표기할 때는 소리 나는 그대로 쓰지 말고 문법에 따라 단어의 형태를 살리기를 주장했다. 말하자면 `머그로`가 아닌 `먹[墨]으로`, `소네`가 아닌 `손[手]에`와 같이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글씨를 쓸 때는 왼쪽에서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이 편리하고 앞부분의 뜻을 생각하기에도 좋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1909년까지 존재했지만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한글 철자법공포는 하지 못했다. 
 일제 치하에서도 조선어 교육을 계속하면서 최남선이 조선의 고서를 간행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광문회에서 국어사전의 편찬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주시경이 한글 교육의 본거지로 삼았던 상동교회는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주시경과 그 제자들 중에는 대종교 신도가 되거나 상동교회와 신민회를 매개로 이후 상해파, 고려공산당 등의 초기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한 문화운동을 넘어 정치혁명을 한 사람도 있었다. 
 주시경은 계속되는 일제 탄압에  국외 망명을 결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4년 7월,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으로는 21세 때 결혼 아내 김명훈과 사이에서 난 2녀 3남이 있었다. 저서로는 국문 연구서인 [말의 소리] 등이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국어 교재인 [대한 국어문법], [국문초학]을 발간했다. 이 저서들을 통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의 맞춤법과 음운을 정리할 수 있게 된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주시경에 의해 기존의 훈민정음이나 언문등으로 불리던 칭호가 [한글]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  
 한글은 어린 아이도 하루 동안만 공부하면 넉넉히 다 알 만한데 이렇게 쉬운 글자를 두고 한자와 같이 어려운 글을 배우려고 다른 일도 못 하고, 다른 재주도 못 배우고 십여 년을 공부하고서도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이 반을 넘는다. 이 때문에 백성은 무식하고 가난하며 나라는 어둡고 약해진 것이다. 세종대왕이 남녀노소 상하 빈부귀천 없이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모든 일을 기록하고, 사람들은 이로써 의회, 내무 외무, 재정, 법률, 육해군, 경제학 등 실상에 유익한 학문을 익혀 우리나라 독립에 기둥과 주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가 말한 영토는 독립의 기초이며 그 종족은 독립의 형체며 본성이라 말하며 그 민족의 언어가 그 민족의 생성과 존립의 핵심이라고 한 것이다. 나라가 강해도 백성의 자국성이 약하면 나라도 약함을 면치 못하고, 나라가 약해 맘대로 숨 쉬지 못하더라도 백성의 자국성이 강하면 결국 강해질 것이니 자국을 보존하며 자국을 흥성케 하는 길은 국성(國性)을 장려함에 있다고 했다. 남의 나라를 빼앗으려 하는 자는 그 말과 글을 없애고 제 말과 제 글을 가르치려하는 것이니, 이에 자국을 지키고 민족을 지키기 위해선 국어와 국문을 숭상하며 사용함에 달렸다고 했다. 
 그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 베트남의 사정을 다룬 [월남망국사]를 한글로 번역한 것도 국어와 국문을 통해 단군 이래 고유하게 지녀 온 민족과 국가를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10년에 대한제국은 일제에 병합되었고, 한국어도 일본어에게 `국어`의 지위를 빼앗겼던 것이다. 이 때문에 [국어문법]도 주시경의 이 같은  서문을 삭제한 채 1911년 [조선어문법] 재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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