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금은 주로 국용(國用)과 사대(事大)에 쓰였고, 

15세기에 왕실과 관료들의 복식, 제구(祭具)에 사용

금의 순도는 캐럿(karat), 단위는 (K)로 표시. 100% 금은 24K, 

금 75%에 은과 동이 25%일 때 18K, 금 60%일 때 14K로 표시.

 

사진: 용문양의 금비녀(金簪)

 고대사회에서 금의 용도는 공예품과 장식품, 그리고 제례에 쓰는 제기와 불상을 제작하는데 쓰였다. 고려 공민왕 때는 금을 화폐를 주조해 썼고, 가까운 나라 중국과 일본의 외교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개국 초부터 1429년(세종 11년)까지 37년간 금 150냥(兩)과 1481년부터 1484년까지 4년간을 40냥씩을 명나라에 사대의 뜻으로 해마다 조공하데 사용했다. 
 우리나라의 금은 그러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우리나라는 금광(金鑛)를 갖지 않은 군(郡)이 없을 만큼 전국 팔도에 걸쳐져있다. 대규모 금 산출지는 평안북도 운산, 대유동, 창성, 구성, 신연, 의주 등지로 북한지역에 많았다. 남한은 충북 태창, 무극, 충청남도의 구봉, 임천, 강원도의 홍천ㆍ옥계, 전라북도의 금구, 전라남도의 광양, 경북의 상주, 금정 등에 금광산이 있는데 반해 금광맥은 많으나 함금률이 높다한다. 
 금의 순도는 캐럿(karat, 단위는 K)으로 표시하여 100% 금일 때는 24K, 금 75%에 은과 동이 25%일 때 18K, 금이 약 60%의 순도일 때 14K로 표시한다. 금 70%와 은 30%의 합금을 녹금(綠金)이라 하고 가공할 때 소량의 동(銅)을 첨가되면 색과 광택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은(銀)을 첨가하면 금색이 감소하는 대신 은색을 더 많이 띠게 된다는 것. 자연금이라 해서 100% 순수한 상태가 아니라 은 성분이 혼합된 것이라 한다.

사진: 제기
사진: 북방의 삼바리 동복(솥) 형식의 탕 그릇.
사진: 종묘제례 곡식을 담는 사각형 제기. 보(簠). 쌀(도,稻)과 수수(량梁)을 담았다.(전주박물관)

 금 제련법은 삼국시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사금을 도가니에 넣고 금이 완전히 용융했을 때 방망이로 도가니를 가볍게 두드리면 금은 엷은 조각으로 굳어지게 되고, 황토에 소금을 섞어 금 조각을 싸서 다시 불에 구우면 엽자금이란 것이 된다. 이 엽자금은 모래 위에 금 조각을 놓고 몇 겹을 철사로 묶어 불에 달구면 금이 차차 엷어지면서 빛이 붉어져간다는 것.
 우리나라 금제 유물은 삼국시대의 신라와 백제가 뛰어난 기법을 사용한 것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대체로 이들 제작공정은 불을 이용한 단금의 것들로 가열용해성 주조제작이 가능한 판금가공, 타출기법, 압출기법 등속의 갖가지 전문방법이 있었던 걸로 설명되고 있다. 
 합금은 은이나 동에 섞으면 각기 독특한 색채를 내는데 금속공예로 도금이나 금박, 불경에 쓰이는 금니 등에서 쓰였다. 금은 잘 늘어나고 얇은 금판으로 잘라낼 수가 있어 판금가공하고 원하는 대로 자르거나 무늬를 새겨 넣거나 하는 모양새를 넣을 수 있었다. 이런 방법의 대표적인 고대유물들은 신라와 백제 유물에서 많이 보이는데, 금관이나 관대 등은 얇게 늘인 금판을 갖가지 문양을 투각하고 절단하여 형태를 가다듬고 장식을 한 것들이다. 투각에는 무늬 부분을 잘라내고 바탕을 남기는 문양투와 바탕 부분을 잘라 무늬를 새기는 두 가지 양식이다.
 길고 얇게 또는 가늘게 늘어나는 특성을 이용한 방법에서 상감재료로 쓰였다. 상감은 가느다란 금사(金絲)의 선상감과 금판의 평상감 기법의 두 가지로 나누고 다른 여러 기법들도 있다. 불에 가열하면 녹기 쉬운 특성 때문에 불상 등의 주조나 세공용 각종 장신구를 만드는데 쓰이고 금박도금에도 쓰인다. 
 수은에 금을 섞어 동합금의 제품에 바른 뒤 가열하여 수은이 증발한 다음 남은 금을 부착하는 이 방법은 금동불상 제작에 쓰였다. 도금의 좋은 점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계속해서 금을 입힐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수은이 증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유해가스 때문에 요즘은 얇은 금박을 발라 붙이는 칠박법을 쓰고 있다. 금가루를 아교에 개어 종이에 쓰는 기법과 동이나 은에 적당량을 넣어 특이한 석채를 내게 하는 금속공예에 응용하기도 한다.
 금을 이용한 역사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고 또 현재문명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옛 문헌기록에는 왕이 신하에게 황금을 하사한 기록도 보이고 백제가 당나라 태종에게 금박의 갑옷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나라의 사관이 이 옷을 입고 종군하는데 그 갑옷이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는 기록이 고구려와 당의 전투를 설명하는데서 나온다. 
 백제 고이왕은 금꽃으로 장식된 화려한 오라관을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본기에 금과 관련한 기록에는 일성이사금 11년에 민간인에게 금은의 사용을 금하였다하고 또 복식 등의 사용을 신분에 따라 제한하기도 했다. 
 진흥왕 35년에는 황룡사 본존장륙불 주조하는데 도금용으로 1만98푼의 금을 썼다하고, 문무왕 8년에는 능안의 가야무 춤을 보고 금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한다. 경문왕 5년에는 당나라에서 금제 그릇과 은제의 그릇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신라에 사자를 보내 황금을 바쳤다거나 신라에서 당나라로 금제의 불상을 비롯한 공예품을 보냈다는 기록에서 나라와 나라 간에도 수 없이 금이 오고갔다. 
 불교에서 사리함을 순금제의 함을 썼다하고, 그리고 잃어버린 금적(琴笛)을 찾아낸 사람에게 왕이 상으로 금은을 주어 보답케 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는 동종을 금종이라 쓴 예가 있고, 고대유물 중 이상의 기록에서 보이는 것 이외에도 종류와 수량도 놀라울 만큼 많다.
 장신구류에는 관, 관모, 과대, 요패,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이 있고, 불구류에는 불상, 사리구, 경판 등이다. 생활용구로는 기명, 침과 침통, 자물쇠 등이고, 장식금구류에는 무가에서 사용하는 무기의 장식, 의복이나 목관장식 금구 등이 있다. 출토유물에 나타나는 금제공예품들은 금입자와 금사를 이용한 각종 세공기법으로 무늬를 넣고 비취옥 등을 장식하는 등 화려한 것들이 많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금이 많았고 또 금이 널리 유행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구려의 고분은 일찍부터 도굴을 당했다. 고분의 형식이 석실형태여서 도굴이 용이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금제품은 귀걸이나 반지 정도라는 것. 고구려의 귀걸이는 가야계의 형식에 가깝고, 반지는 신라계의 형식에 가까운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도금기술이 주로 마구(馬具)에서 나타나고 불상 등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는 것은 북방의 영향력이라 생각할 수 있다.  
 백제의 금제 유물은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이 대표적이다. 주로 장식용이 많다. 금관과 환을 비롯한 뒤꽂이, 목걸이, 팔찌, 곡옥 장식, 그 밖에 의복 등에 쓰였을 장신구들이 주를 이룬다. 백제의 유물 중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은 일본 이소노카미신궁에 있는 백제의 칠지도(七支刀)가 있다. 이것은 철검의 양면에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4세기경의 상감기법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관식이나 장식금구 등은 정교한 누금세공기법을 응용했고, 곡옥을 감싼 금모장식은  신라고분 출토품에 버금가는 세련된 솜씨를 나타내고 팔찌나 목걸이 등은 현대식 감각마저 느끼게 한다.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가야문화의 금제 유물은 가야고분에서의 출토품은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반지 등에서 뛰어난 도금솜씨도 보이고 있다. 가야의 금공예는 화려하진 않으나 단순하고 간결한 느낌을 갖게 하는 화초형 또는 수목형이라 하는데, 동경국립박물관에 있는 오구라콜렉션의 금관과 같은 형식이라고 한다. 
 신라의 금제 유물들은 신라고분의 출토품으로 그 양과 질에서 모두 두드러지게 다양한 종류와 많은 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보관과 과대, 요패, 팔찌, 반지 각종 장식금구와 기명, 구슬과 방울, 보검, 금사, 불교공예품 등이다. 신라의 보관은 금관총,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에서 출토된 것 들이다.
 황남대총 출토품의 굵은 환(環)과 팔찌는 간단한 금관(管)이나 금봉(棒)을 구부려 만든 것으로 피장자의 오른쪽팔과 왼쪽 팔에 각 5개씩 모두 10개를 낀 채 출토되었다. 목걸이는 유리구슬을 몇 줄에 꿰어 길게 늘인 형식이고, 황남대총에서는 금실로 엮어 만든 금줄에 금제 곡옥을 매달아 늘어뜨렸다. 노서동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는 바퀴들을 여러 번 합쳐 투환을 만들고 목걸이 중심에 파랑색 곡옥 1개를 매단 형식으로 신라의 목걸이는 가슴에서 배까지 길게 늘인 것으로 밝혀졌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용기와 왕궁리 오층탑의 사리용기 등도 금제인 것으로 드러났다. 금제로 된 불상은 구황리에서 나온 금제의 여래좌상과 입상 두 구는 황복사 사리장엄구 속에 있었던 것으로 광배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금제 유물은 신라에 비해 금제는 급격히 줄어들어 금의 희귀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각종 장신구나 호신불 등의 불교공예품이 신라에서처럼은 다양하지도 풍부하지도 않다. 금에 대한 욕망이 강열해진 대신에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금을 멀리하는 성향까지 있었다. 하여 `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까지 생겨났다.
 오늘날 산업화사회에서 금의 용도는 금화, 금은세공, 금은 도금 등의 장식용, 의치, 치과 장비제작에 쓰이는 치과용, 전기도금, 금사(金絲), 반도체연결선 등의 전자공업용 외에도 미사일, 로켓의 칠, 액체금속 등에 이용되고 있고 장신구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금은 권력과 부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사후세계의 장식으로 문화적 유산을 남겨주었다. 금제유물의 희귀성과 불변성이 문명의 발상과 역사를 함께 하면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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