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도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 박사

 통신사행은 1719년 사행을 제외하곤 모두 상행로(上行路)에만 양산에 머문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통신사가 돌아올 때는 3사(三使)가 길을 달리하라는 조령(朝令 : 조정에서 내리는  명령)이 있기 때문에 나는 가운데 길을 택하여 대구로 향하고 부사는 오른쪽 길인 경주로 돌고 종사관은 왼쪽 길인 김해를 향하기로 하였다"는 조엄(趙?)의 사행기록에서 나타나듯, 통신사행의 상행로는 하행로와 달리 3사가 각 각 길을 달리하여 상경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대일사행에서 양산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왕복 노정에 관한 완전한 기록이 없어 추정에 불과하지만 상하행로(上下行路)에, 임진왜란 이후 행해진 통신사행과 1876년 수신사행(修信使行)까지는 상행로에 포함되었고, 신사유람단 사행에서는 상하행로에 모두 포함될 정도로 대일사행에서는 중요한 노정이었다.
 조선통신사는 정사, 부사, 종사관, 제술관으로 구성되었다. 정사(正使)는 조선시대 외국으로 파견하는 사신 가운데 우두머리였으며, 부사(副使)는 정사를 보필하는 역할을 하였다. 종사관(從事官)은 정사와 부사를 보좌하면서 매일 매일의 사건을 기록하였다가 귀국 후 국왕에게 견문한 바를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서도(書道)`로 문화교류를 하였던 사람들로 제술관, 사자관, 서기 등이 있다. 제술관은 문장이 뛰어난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다. 본래 제술관은 통신사의 닛코(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이 있는 곳) 참배 때 축문을 읽을 사람이 필요하여 선발했다. 이후에는 문장을 써서 대화하는 필담과 창을 이용하여 서로 시를 교환하는 창화를 담당하였다.
 일본측의 요청으로 특별히 파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의원, 영원, 마상재인으로 지금의 의사, 화가, 서커스의 기예단원이라 할 수 있다. 영원은 예조의 도화서에 소속된 화가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 처음 파견되었다. 일본인들은 이들에게 그림을 많이 요청하였는데, 이는 조선과 일본의 미술 교류에 크게 기여하였다. 달마도로 유명한 화가 김명국은 그림을 요청하는 일본인의 수가 너무 많아 팔이 아파 울려고까지 하였다고 한다.
 마상재는 본래 임진왜란 때 시작된 것으로 기병들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에서 기초하였다. 인조 때 일본의 사절로부터 마상재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어 시작되었고, 그 이후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마다 마상재인 2명을 보내 마상재의 기술을 일본에 선보였다.
 우리 전통무예인 마상재 기예(騎藝)를 일본 조선인곡마도로 통해 마상재 동작을 비교해 보고, 지역에 소재하는 고지도를 통한 조선통신사 행로의 과거와 현재, 영천 조양각 일원의 역사적 재조명하는 행사가 있었다. 영천시의 예술창작스튜디오 전시실에서 2015년 10월에 특별전으로 조선 통신사와 마상재전이 열렸다.
 전통무예적 속성을 바탕으로 한 마상재 6개 동작(무예도보통지)과 우리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동작 4점을 쓰시마 민속자료관 소장 조선인곡마도(朝鮮人曲馬圖 : 14점)로 관찰하였다. 조선통신사 사행로에서 신녕, 영천의 행로를 짐작할 수 있는 4점의 고지도로 조선시대 영천읍성과 조양각 일원의 옛모습을 재조명하였다.
 `2015년 문화의 달 정부기념행사`가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영천강변공원 일원에서 `조선통신사와 마상재`란 주제로 열렸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후기에 일본으로 파견됐던 외교사절단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류문화사절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 화친을 위해 통신사 파견을 요청해 옴에 따라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 동안 12차례 파견되는 과정에서무려 11차례에 걸쳐 교통의 요충지인 영천을 경유했다.
 임진왜란 뒤 조선과 일본의 국교는 형식상 조선이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진행되었다. 일본 사신의 서울 입경은 허락하지 않고 동래의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예조참판이나 참의에게 일본 국왕의 친서를 보내와 사신 파견을 요청해 오는 것이 관례였다.
 일본은 60여 차에 걸쳐 차왜(差倭 : 일본에서 보내는 사신)를 보냈으나,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에서 선발되었으나 일본에 가서는 재상 또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참의는 조선의 정3품 관직이다. 각 조의 수장인 판서를 보좌하는 보좌관 역할을 하였다. 육조의 판서, 참판, 참의는 모두 당상관에 해당하므로 이들을 삼당상(三堂上)이라 불렀다. 오늘날의 차관보급에 해당한다.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된 뒤 1636년부터 1811년까지 9회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를 원하는 막부의 요청으로 취임을 축하하는 것을 형식적인 임무로 삼아 파견되었으나, 그 외에 그 당시 정치, 외교적인 현안에 관련된 협상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전기와 달리 조선과 일본이 함께 청나라라는 신흥 대륙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서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제1차 통신사는 1607년 정사 여우길, 부사 경섬, 종사관 정호관으로 구성되었으며 인원은 467명이었다. 제4차부터는 제술관이 포함되었다. 1636년 정사 임광, 부사 김세렴, 종사관 황호, 제술관 권칙으로 인원은 475명이었다. 수행 인원이 가장 많았던 때는 제8차로 1711년 정사 조태억, 부사 임수간, 종사관 이방언, 제술관 이방언으로 1711년 500명이 수행하였다. 제12차는 정사 김이교, 부사는 이면구, 종사관은 기록에 나오지 않고, 제술관은 이현상으로 1811년 수행원은 336명이었다. 
 대략 4~5백 명의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면서 1,400여 척의 배와 1만여 명의 인원이 일본 측에서 동원되고 접대비는 한 번(藩)의 1년 경비를 소비할 정도로 성대하였다. 일본 측의 부담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선진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지는 통로였다. 양산의 조선 통신사 사행로 옛길은 복원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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