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 골짜기 돌무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특리와 화계리 일대에 걸쳐 있는 왕산(고도 924m)은 구형왕릉에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왕산과 왕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왕산은 현의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산중에 돌을 쌓아 만든 둔덕이 있고, 사면은 모두 층계로 된 왕릉이 왕대암(王臺菴)이다" 그리고 [대동지지] 산청편에는 "가야국 구형(仇衡) 왕릉이 왕산사 뒤 돌무더기 둔덕에 있다. 왕산사 절은 구형왕이 거주한 수정궁이다. 구형왕의 사당이 산 아래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산청군지에는 "지리산에서 맥이 와서 왕산사의 주맥을 이루었고, 김해 김씨가 사당을 건립하여 수호한다."라고 기록했다. 

금관가야의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 거대한 돌무덤은 구형왕릉(사적 제221호)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재위한 왕이다.

산청 왕산 자락에 있는 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무덤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적석총으로 알려졌다. 7단으로 쌓은 피라미드형식의 왕릉 주변에는 등나무나 칡넝쿨이 자라지 않고, 까마귀나 참새 따위의 새들도 왕릉위로는 날지 않는다고 한다. 뼈에 저린 망국의 한이 서려서인지 이끼나 풀도 자라지 않고,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신비함으로 언제나 씻은 듯이 주변이 맑고 깨끗하다. 

왕산(王山)은 계곡이 아름다운데 크고 작은 잡석들로 일곱 층을 쌓은 높이 7.15m짜리 거대한 돌무더기 주변에는 어른 허리높이 정도의 돌담이 둘러쳐 있다. 4층 정면에 사각으로 된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벽으로 막혀 있어 그 속의 사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구형왕 비석에는 `駕洛國讓王陵(가락국양왕릉)`이라 새겨져 있다.?가락국은 삼국시대 신라에 복속된 가야를 뜻하고 `양왕`은 나라를 바친 왕을 말한다. 신라에 항복한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이라는 뜻이 된다. 

법흥왕 19년(서기 532년) 금관국의 왕 김구해(구형왕)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아들 무력과 손자 서현(김유신의 아버지)과 더불어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구형왕은 이미 승산 없는 싸움에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신라의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의 직위를 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구형왕은 이를 거절했다. 

전쟁에서 패하면 포로들은 노비가 되기 마련인데, 구형왕은 포로가 된 군사들을 노비가 아닌 백성으로 받아줄 것을 부탁하고 자신은 적에게 나라를 바친 왕이니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는가,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산청의 왕산사에 머물다 5년 뒤 죽음을 맞이했다. 

이 능은 1798년 어느 유생이 왕산사의 궤짝에서 왕산사기를 발견하여 구형왕릉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현세에 이르러 이 돌무덤의 주인이 진정 구형왕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사료의 뒷받침이 부족하여 구형왕릉이라 확정을 받지 못하고 [전(傳) 구형왕릉]이라 불리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구형왕(521-532년 11년간 재위)은 신라 법흥왕에 항복하기 전까지 492년간 계속되었던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왕비와 아들 셋과 함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했다고 전한다.

산청군 구형왕릉(사214호)

김(金)은 쇠(鐵)의 어원으로 금관국(金官國)

가락국인 금관가야는 김해와 부산 일대에 많은 고분군과 부장된 유물을 남겼다. 금관가야와 관련된 주요 유적지와 고분군이 널려있다. 왕궁터인 김해시 봉황동유적지와 예안리 고분군, 구산동 고분군, 대성동 고분군, 특히 후기 가야 고분군으로 알려진 원지리 고분군은 20여기에 달한다. 그리고 동래 복천동 고분군은 광개토태왕의 남정 전까지 고분조성이 이루어졌고, 조성이 중단된 때로부터 가락국이 패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라와 함께 가야의 장례풍습 중에 주요특징은 많은 유물을 함께 묻는 후장이어서  토기와 다양한 유물을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독무덤과 널무덤이 함께 나타나고 부장품과 더불어 순장의 풍습은 북방문화의 영향일 거라는 설이다. 금속유물은 철정과 철제 갑옷과 금동관이 발견되었다. 초기에는 철이 주종을 이루고 금, 은 등의 귀금속과 옥이 출토되었다. 

전기 가야 맹주국인 금관가야가 몰락하고 함안의 안라국과 고성의 고자국 등의 가야 서부 제국이 활발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반면에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경상 내륙지방 소국들이 5세기 후반에는 세력을 확대하여 후기 가야연맹을 결성했다. 소백산맥을 넘어 섬진강 유역의 호남 동부지역까지 확대되었으나 6세기에 백제에게 패하여 호남지역을 잃고, 522년에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국제적 고립을 극복하려 했으나 530년을 전후하여 신라에 넘어가고 말았다.

540년대 이후 가야제국은 대가야 안라의 이원체제로 분열되었다. 백제와 신라 사이의 교섭을 통한 독립을 하려했으나 550년대에는 백제에 복속되어 명맥을 유지하였다. 백제의 관산성 패전 이후 562년에 대가야국은 신라의 습격으로 함락되면서 후기 가야 연맹이 종식되었다.

원래 가락국은 많은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중 큰 세력을 가진 국가는 5, 6개국 정도였다. 소국들은 소규모의 독립국가로 이들 국가 주위에 인접해 있으면서 큰 국가를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이 때 형성된 세력권은 김해와 웅천 중심의 본가야, 고령과 대구 중심의 대가야, 함안,진해,창원, 중심의 아라권, 충무, 고성, 거제 중심의 소가야 등이다. 중심 세력권은 본가야권과 대가야권, 아라가야권이었다.

가야제국들의 강역은 동쪽은 의성, 대구, 경산, 양산이었고, 서쪽은 지리산, 남쪽은 창해, 북쪽은 문경지방까지 였다. 낙동의 서쪽으로 치우치게 된 후기 가야의 소국들은 대가야(고령), 안라국(함안), 사이기국(부림), 다라국(합천), 졸마국(함양), 고차국(고성), 자타국(진주), 초팔국(초계), 걸손국(산청), 임례국(의령), 금관국(김해), 탁순국(창원), 탁기탄국(영산) 등 13국이었다.

전기 가야 12국은 미리미동국(밀양), 접도국(칠원), 고자미동국(고성), 고순시국(산청), 반로국(고령), 낙노국, 미오야마국(창원), 감로국(개령), 구야국(김해), 주조마국(함양), 안야국(함안), 독로국(부산), 벽진국(성주)과 비사벌국(창녕)으로 알려졌다.

가야 후기에 포함된 호남지역은 상기물(장수, 임실), 하기물(남원), 사타(순천), 물혜(광양), 상달이(여수), 하다리(돌산)등이 있다.기원전 42년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변천사는 태동기인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경으로 부족국가시대였고, 발전기는 3세기경에서 5세기 말엽은 영역국가시대였고 쇠퇴기는 6세기 초엽부터였다.

역사는 문자로 증명되기도 하고 유적이나 유물로 진실이 고증되는 것.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동아시아 정세는 급박했다. 북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부여가 약화되고 고구려가 세워졌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중국 한나라가 지배한 한사군이 한반도 동남부에 세워졌으나 곧 사라졌고 고구려에 이어 백제가 세워졌다. 한반도 남쪽 김해를 중심으로 김수로왕과 다섯 형제들이 여섯 개의 가야국을 세우고 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가 가야국 전체를 총괄했다. 

이 무렵 경주 서라벌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들이 국가를 형성하고 연합체 부족장들이 이사금이란 칭호로 박씨, 석씨, 김씨가 번차례로 왕이 되었다. 왕자의 세습제가 아닌 민주주의 의회형식의 족장 협의체로 왕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고대 국가로는 믿기 어려운 민주주의 체제였다. 17대 내물왕 때 마립간이란 칭호로 김씨가 왕위를 지속했는데 19대 눌지 마립간 때 백제와 나제동뱅을 맺고 6세기 초, 22대 지중왕 때에 낙동강유역의 가야를 평정하게 된 것. 이때부터 국호를 [신라]로 명명하고 마립간에서 왕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신라의 품계는 부계와 모계가 모두 왕족이면 성골(聖骨)로 불리고, 부계와 모계 중에 어느 한쪽이 왕족이거나 다른 한쪽이 귀족일 때는 진골이라 했는데 성골이거나 진골들만이 왕이 될 수 있었다. 

금관가야 후손들 신라에서 대 반전
김유신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결혼동맹과 삼국통일 전쟁에서 전공을 세움으로 신라 진골귀족들과 동급의 성과를 올려 사후 흥무대왕에 추증, 신라왕이 되었다. 

한민족개념이 정립되기 전까지 한반도에는 고대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서로의 영토 확장을 위해 싸웠지만 삼국을 하나로 통일을 한 나라가 신라다. 여기에 무장 김유신이 당대의 권력층인 왕과 귀족들 그리고 불교 지도자들을 제치고 최고의 위인으로 등장한다. 김유신(金庾信)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통일에 큰 업적을 남긴 명장으로 백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당나라와 연합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김유신의 조상은 신라에 의해 532년(법흥왕 19)에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족이었다. 김유신의 아버지는 각간(角干, 신라의 최고위급 관직) 김서현(金舒玄)이다. 할아버지는 각간 김무력, 증조부는 구형왕, 고조부는 겸지대왕이다. 김유신 가계는 이미 겸지대왕 때부터 신라 귀족과 혼인으로 맺고 있었다. 나라간의 혼인은 화친이나 교섭의 방법으로 정치에 활용하는 것이 고대 국가들의 외교방법이었다. 김유신의 어머니 역시 신라의 왕족출신인 만명 부인이었다. 김유신이 가야 출신이지만 신라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신라출신 만명 부인과 가야 출신의 김서현의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은 어려서부터  유달리 영특하여 외가 왕족들로부터 눈길을 끌었고, 부친 김서현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사위대접을 받고 있었다. 당시에 가야 출신이라는 점은 김서현과 김유신 부자에게 여전히 불리했다. 김유신은 가야계라는 열등감보다는 신라 왕족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에 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어려서 부터 심신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해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를 이끌면서 남다른 기개로 삼국통일을 꿈꾸었다고 한다. 

이후 김유신은 무인으로서 크고 작은 전투마다 참가해 전공을 세우고 특히 여동생이 김춘추와의 혼인으로 하여 스스로 입지를 다져갔다. 그의 나이 34세가 되던 629년(진평왕 51)에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크게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김유신이 종무열왕인 김춘추와 결혼동맹으로 하여 김춘추를 왕위에 올리는데도 공을 세웠고, 삼국통일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김씨 집안을 다른 진골귀족들과 동급으로 끌어올렸다. 김유신 자신도 생전의 전공으로 사후 흥무대왕에 추증되어 신라의 왕이 되었다. 그 후 그의 손자인 김윤중도 북방의 말갈족을 평정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처럼 금관가야 후손들은 신라에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며 대 반전을 이루어낸 것이다.

저작권자 © 양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