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철광석에 포함된 비소(AS) 성분을 토대로 양산지역에서 생산된 철기를 찾기 위한 움직임 있어. 그러나 비소가 포함된 철광석은 김해지역부터 울산 달천지역에 걸쳐 생산. 따라서 1500여 년 전에 생산된 철기 중

왼쪽 사진이 2~3세기경의 금관국에서 사용한 창촉류(김해 양동리 고분군 출토, 사진:김해시청)이고, 오른쪽은 5세기 이후 금관국에서 사용한 창촉류이다(동래 복천동 고분군 출토, 사진:동래 복천동 고분군 발굴도록). 금관국이 사용한 무기의 종류와 질은 시대별로 차이가 있다. 그중, 특히 창촉과 화살촉의 변화가 가장 눈에 띈다. 3세기 후반 이전까지 보이던 창은 자루가 길고, 그 촉은 자루에 비해 지나치게 날이 긴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는 베는 기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는 전장에서 군사들이 착용한 갑옷의 방어력이 떨어졌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렇다 보니 관통력이 강한 창 보다는 베는 기능이 강한 길고 넓은 창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4세기 대에 들어서면 금관국 지역에서 발견되는 창날은 훨씬 짧고 좁으면서 뚜렷한 마름모꼴을 보이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화살촉 역시 기능에 따라 세분화 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베는 기능 보다는 관통력 증대에 초점을 맞추어 제작된 것으로 봐야할 듯 싶다. 바로 초강법은 바로 이런 방어력과 공격력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군사적 초점에서 발달한 제철기술의 하나로 이해야할 것이다.

이미 수차례 언급한 대로 양산 물금광산은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철광석 생산의 중요한 산지였다. 때문에 초기 삼국시대부터 양산지역에서 철기를 생산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관련학자들로부터 끝임 없이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설(說)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1997년경에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와 가촌리 일대에서 철광석을 제련하던 로(爐)와 관련된 유적이 다수 발견되기 했으나, 이는 금관국이 신라에 합병되기 이후인 7세기 전후의 유적으로 관련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또 1999년과 2000년 밀양시 사촌지역에서 발굴된 제련관련 유적 역시 6세기에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듯 양산지역에서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제련로(製鍊爐), 생산된 철에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순도를 높이기 위한 정련로(精煉盧) 그리고 최종 중간재로 생산된 철로 제품을 만드는 단야(鍛冶)시설 등 철기 생산을 위한 최적화된 생산특화시설이 발견되지 않는 한 금관국 시절 양산지역에서 철기를 직접 생산했다는 주장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비록 양산지역에서 관련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다고 해서 양산표 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역(逆)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1500에서 2000여 년 전에 생산된 양산표 철기를 찾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가 앞서도 언급했던 양산 물금지역에서 생산된 철광석에 풍부하게 포함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 비소(AS)성분이다. 이 비소성분을 통해 일단 범위를 한반도 남부, 즉 양산지역과 울산지역으로 좁혀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철기에 소요되는 중간재인 철정(鐵鋌)의 생산방식이다.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이지만 사실 이 철정의 생산방식을 통해 금관국에서 생산한 철정이냐 아니냐를 어느 정도는 가릴 수 있다고 여긴다. 

잘 알려진 대로 6세기 중반 이전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철기제작 선진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국가는 금관국과 대가야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두 나라가 있었던 지역에서 출토된 철기에 사용된 중간재인 철정의 제조법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먼저 대가야의 철정 제조기술을 들여다보자. 이를 위해서 대가야 철생산 기술이 어떤 성장을 보였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잘 알려진 대로 대가야는 4세기 중ㆍ 후반까지는 그다지 주변 지역을 압도할만한 세력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대가야의 근거지인 고령지역에서 1세기 ~ 4세기까지의 유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5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령 지역에 위치한 대가야는 그 세력이 급성장하게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 고령 지산동 대가야 고분이다. 

이 고분군은 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동 주산(主山) 남쪽 기슭을 따라서 무려 2백여 기가 무덤이 형성되어 있는데, 1906년부터 1978년까지 모두 8차례 발굴이 이어졌다. 현재 72호분까지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07년에는 그간 발굴되지 않았던 73호분부터 75호분까지의 발굴되기도 했다.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중요 유물은 주로 토기류와 철기류가 대부분이다. 

대가야 지역에서 출토되는 철기유물 및 유적 중 4세기 이전 것들은 그 수준이 금관국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5세기에 생산된 것들은 상당한 수준의 철생산 기술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학계에서는 대가야가 5세기 때 갑작스런 철기관련 기술의 급신장을 광개토대왕 남정의 결과로 거의 몰락하다시피 한 금관국 출신 철 관련 기술자들이 대가야 영역으로 대거 유입된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철기유물 중 외지에서 유입된 철기를 제외하고 고령 지역 자체에서 생산된 철기에 적용된 기술이 당시 4세기 이전 경남 남부해안지대에서 출토된 철기유물들의 제조법인 괴련강(塊鍊鋼: wrought iron) 관련 방식으로 분석되고 있다는 점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중 후기가야문화). 괴련강은 해면철(海綿鐵: sponge iron)의 일종인 괴련철(塊鍊鐵: bloom)을 정련하여 만드는 것으로서 그 공정이 다소 복잡하고 인력이 대량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된 철의 양과 질로 볼 때 인력과 시간이 대량 투입되는 비효율적인 제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당시 금관국은 고구려와 백제만이 보유하고 있던 새로운 철기생산기술인 초강법(炒鋼法)을 통해 생산된 철정(鐵鋌)을 주요 수출 품목으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노태천,`韓國古代冶金技術史 硏究`, 1999). 다시 말해서 철정(鐵鋌)은 중간재 형태의 철소재로서 용융된 선철로부터 직접 주조해서 만드는 초강법을 통해서 생산되는데, 동래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철정을 분석한 결과 단타(鍛打)에 의한 여러 겹 상태, 미세한 조직결정, 낮은 탄소함량 등이 이를 잘 설명해주다. 여기서 말하는 초강법에 대해서 국내 삼국시대 철기생산관련 연구의 권위자인 노태천(전 충남대학교 사범대학 기술교육과 교수)는 1999년에 발표된`韓國古代冶金技術史 硏究`를 통해 선철에서 연철(숙철과 강철)을 얻는 제철법의 한 가지 방법이며, 선철을 용융된 상태로 유지하면서 쇠막대로 휘젓은 다음에 여기에 철광석가루나 사철 등을 첨가함으로써 선철 속의 불순물을 산화시켜서 4.3%에 달하는 과도한 탄소함유량을 2% 이하로 낮추거나 슬랙을 제거하면 융점이 상승해 반 용융상태로 되고, 이때 단타하여 슬랙을 제거하면 연철이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렇듯 초강법은 당시 철생산의 하이테크 기술이나 다름없었다. 
탄소함량이 과도한 강철(鋼鐵)은 녹는 온도는 급격하게 낮아지고 강도는 높아지지만, 대신 잘 부러지거나 부서지게 된다고 한다. 반면 탄소함유량이 과소한 연철(軟鐵)은 철분자 사이의 빈 공간에 소량의 탄소원자가 제멋대로 들어간 상태를 일컫는데, 가공하기는 쉬우나 충격이나 힘을 받으면 엿가락처럼 잘 휘어진다고 한다. 철기, 특히 무기류에 적합 철은 강하지만 잘 부서지거나 휘어지지 않아야만 한다. 따라서 철소재에 탄소함유량이 많아도 적어도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철기제품에 최적화된 중간소재를 생산하는 기술이 바로 초강법인 것이다. 

탄소함량이 어느 정도를 넘으면 철원자 셋에 탄소원자 하나가 기본(Fe3C)인 `시멘타이트`라는 강하지만 부서지기 쉬운 조직이 나타난다. 바로 이 `시멘타이트`라는 성분이 철의 강도와 연성(軟性)을 결정하는 것이다. 주철은 강철보다 탄소함량이 높아 시멘타이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서 강도는 높지만 충격을 받으면 쉽게 깨지고, 반면 연철은 시멘타이트가 적어서 강도는 약하지만 잘 구부러지는 탓에 충격에 잘 견딜 수 있는 편이다. 즉, 철 소재에 탄소함량이 늘어나면 녹는 온도는 급격하게 낮아지며 강도는 높아진다. 연철은 철원자 사이의 빈 공간에 소량의 탄소원자가 제멋대로 들어간 상태다. 보다 전문적으로 설명해보면 주철은 강철보다 탄소함량이 높아 시멘타이트가 차지하는 비율도 높다. 때문에 주철은 강도가 높지만 충격을 받으면 쉽게 깨진다. 반면 연철은 강도가 약해 잘 구부러진다. 그러므로 주철보다 충분한 강도를 지니는 동시에 충격에 잘 견디는 연철이 쓰임새가 훨씬 큰 철 소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가공과정에서 두드림이나 각종 열처리를 거쳐 그 성질을 자유롭게 조절하여 쓸 수 있는 굉장히 범용적인 철 소재였을 것이다(박장식, `과학동아`2006년 10월호). 다시 말해서 초강법이란 연철을 두들김 등의 단타나 각종 열처리를 거쳐 탄소함유량이 극히 낮은 강철을 대량 생산하는 최첨단 기술인 것이다. 이렇게 초강법을 통해 생산된 철정은 금관국에서 생산된 우수한 철제품의 원천이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철광석을 직접 용융시켜 쇳물을 얻어내는 초강법은 탄소함유량이 극히 낮은 고품질의 강철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하이테크 기술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철이 녹는 온도인 약 1500도에서도 견딜 수 있는 노를 제작할 수 있어야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괴련강은 섭씨500~600도에서 일어나는 철광석의 환원반응을 통해 생산된 괴련철의 내부에 남아 있는 불순물 따위를 단조에 의해 제거하여 제조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5세기초엽부터 대가야 지역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초강법이 아닌 괴련철 기반의 철기제작 기술은 광개토대왕 남정의 결과로 몰락한 금관국의 철 관련 기술 인력의 유입으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김해의 가야세력이 급격히 쇠퇴하였다고 보는 시각이 반드시 옳다고는 볼 수 없으며, 특히 김해 대성동 고분군 발굴 결과를 통하여 나타난 김해 가야세력은 5세기 전반까지는 여전히 강력한 가야국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지적은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따라서 고령 대가야의 성장 요인도 다른 쪽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대가야박물관홈페이지 http://www.daegaya.net) 

이상과 같이 금관국의 철기제조술과 대가야계열의 철기제조술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따라서 양산지역에서 생산된 이른바 양산표 철기를 찾기 위한 범위는 결국 김해와 양산 그리고 부산 지역에서 생산된 철기로 한정시킨다고 해도 그렇게 무리한 추론은 아닐 것이라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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