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량문화축전이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되어 다양한 프로그램과 이벤트, 볼거리를 제공하고 무사히 막을 내렸다. 축전 프로그램 중에서 김서현 장군 출정식이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축제장에 온 양산시민들은 김서현 장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양산숲길보전회에서 홍보 부스를 운영하며 많은 방문객을 맞이하여 해설을 하였다. 마침 9월 24일에는 김서현 장군의 부친인 김무력 장군 묘소를 답사하고 찍은 단체사진을 부스 내부에 플래카드로 만들어 전시를 했다. 김무력 장군의 공훈을 해설해주면서 자연스럽게 그 아들인 김서현 장군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방문객들은 흥미롭게 경청하며 이번 축제에서 주요 인물로 내세우는 역사적 인물인 김서현 장군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을 하였다.

김서현 장군은 김유신의 아버지로 금관가야 수로왕의 11세손이다. 『삼국사기』 권41 열전 김유신 전에 인용된 유신비(庾信碑)에는 소연(逍衍)이라 나온다. 김서현(金舒玄)의 다른 이름이 김소연(金逍衍)이라고도 전하는데, 소연이 다른 이름인지, 자(字)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병도가 번역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서현과 김소연은 같은 이름을 다른 한자로 적은 것뿐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인용된 문무왕의 제서(制書)에는 김서현이 구형왕의 손자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舒雲) 잡간으로 표기되어 있다.

김서현 장군은 만노군 태수, 소판으로서 대양주 도독(大梁州 都督), 안무대양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고 관등은 이찬에까지 이르렀다. 삼국사기 제43권 김유신 열전 하(下)에는 양주총관(良州摠管)으로 나온다.

유신의 부친 서현은 양주 총관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을 꺾음으로써 그들이 우리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상에 종사하였고, 임금과 신하는 나라에 대한 근심이 없게 되었다. 지금은 유신이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사직을 맡는 신하가 되었다. 그는 나가면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오면 정승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한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신라 제26대 진평왕 51년(629)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 현재의 충북 청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신라는 진흥왕대 이후에 잃어버렸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김서현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김무력(金武力) 장군이다. 아내는 입종갈문왕의 손녀이자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만노군(萬弩郡 : 현재의 충북 진천) 태수 및 양주(良州 : 현재의 양산) 총관을 역임하였다.

『삼국사기』 권41 열전1 김유신(上)조에는 또한 서현과 그의 부인 만명(萬明)의 만남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에 따르면 서현은 길에서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을 보고 마음에 들어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결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 태수(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서야 딸이 서현과 야합(野合)한 것을 알고 미워해서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갑자기 벼락이 문을 때려 지키던 사람이 정신없는 사이에 만명이 창문으로 빠져나가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김유신(金庾信), 김흠순(金欽純) 등 두 아들과 보희(寶姬), 문희(文姬, 文熙) 등 두 딸을 두었다. 막내딸인 문희는 김춘추와 결혼하여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되었으며 문무왕을 낳았다.

김서현 장군의 아들인 김유신 장군의 탄생과 관련하여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 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595) 을묘에 태어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났으므로,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었고 또 신이한 일이 많았다. 나이가 18세 되던 임신년(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 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낭도의 무리에 여러 해 동안 속해 있었다. 유신랑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일로 밤낮 깊이 모의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모의를 알고 낭에게 고해 이르기를, "제가 청컨대 공과 더불어 몰래 먼저 저쪽을 탐색하고, 그 이후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낭은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도중에 세 명의 여자 호국신(護國神)이 나타나 "지금 적국의 사람이 낭을 꾀어 유인하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길을 나아가니, 내가 낭을 만류하려고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공이 듣고 놀라 쓰러지며 두 번 절하고 나왔다. 백석에게 일러 말하길, "지금 타국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었으니, 청컨대 너와 함께 집에 돌아가서 가져와야하겠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함께 돌아와 집에 이르러서 백석을 결박하고 사정을 물었다.

우리나라 군신들이 이르길, `신라의 유신은 우리나라에서 점치던 선비 추남이다(고본에서는 춘남(春男)이라고 하였다). 나라의 경계에 역류하는 물(혹은 웅자(雄雌)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일이라고 한다)이 있어서 그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아뢰기를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했으니, 그 단서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왕비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는 요망한 여우의 말이다`라고 하고는 왕에게 고하여 다시 다른 일로써 시험하여 물어보게 하고 잘못 말하면 중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넣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쥐입니다. 그 목숨은 여덟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잘못 말하였다고 하고는 장차 참죄(斬罪)를 가하려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맹세하여 말하길, `내가 죽은 후에 원컨대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베어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 보니, 그 목숨이 일곱이었다. 이때 앞서 한 말이 맞은 것을 알았다. 그날 밤에 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추남이 신라 서현 공 부인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를 군신에게 말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추남이 마음으로 맹세하고 죽었으니 이것이 과연 그러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까닭에 나를 보내어 이러한 모의를 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백석을 처형하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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