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삼장수가 태어난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단순한 전설로 치부하기에는 말과 관련한 전설과 지명, 말 무덤, 유적이 현재도 남아 있어 신빙성이 높아지고 있다. 갑옷바위, 도마교, 명곡동 말 무덤, 금정산 말 무덤, 금봉탕 등은 이러한 전설을 입증하는 증거들이다.

이징규 장군이 어린 시절 무예를 연마할 때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징규는 활의 명수로 화살을 쏜 후 화살을 쫓아 말을 달리면 말이 멈추는 곳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징규는 하사받은 천리마가 얼마나 빠른가를 시험하여 활을 당기고 말을 달렸다. 도마교에서 말이 더 이상 달리지 않고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의 목을 쳐서 죽였다. 바로 그때 화살이 날아와 그 자리에 박혔다고 한다. 말이 화살보다 앞서 온 것이다. 자신의 무지와 경솔한 행동을 뉘우치고 용마 무덤과 함께 도마비를 세웠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역사의 현장은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이고, 현재의 다리명도 도마교이다.

삼장수 중 맏이인 이징석 장군의 묘는 양산시 명곡동에 있다. 묘 앞에 말 무덤이 있다. 묘역이 상당히 큰데, 상석과 석상만이 남아 옛날을 말해주고 묘표(墓表)는 종중에서 세웠다고 한다. 문무석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묘비(墓碑)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생 이징옥 장군의 난으로 수난을 당한 듯하다.

양산 이씨 종중에서 말의 무덤인 마총(馬塚)을 파 보았다고 한다. 마총에는 숯이 수십 가마 묻혀 있었다고 한다. 말 안장 등 마구가 나오고 상자 안에 말의 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부장품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숯을 넣은 것은 조상들의 지혜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말 안장, 상자 등은 옛 모습대로 다시 파묻어 놓았다고 한다. 주변은 지금도 숯덩이가 발견되고 있다.

양산시 동면 계석마을에서 금정산 장군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마을에서 세운 안내판이 있어 등산객들이 쉬어가면서 그곳의 유래를 알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있다. 등산로에서 단순한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보다는 마을 지명의 유래, 인물과 연관된 전설을 알려주는 스토리텔링식 안내판이 훨씬 더 유용하다. 계석마을의 사례는 양산시 다른 지역의 등산로에도 적용하여 설치하면 좋을 것이다.

첫 번째 안내판은 2007년 3월 10일 계석 마을회에서 세운 `뒷등대`에 관한 것이다. 뒷등대 의미는 마을 뒤편의 언덕배기를 뜻한다고 적혀 있다. 언덕배기는 언덕의 꼭대기, 또는 언덕의 가파르게 비탈진 곳을 말한다. 유래는 현 위치로부터 북쪽방향으로 약 100m 아래의 무덤과 어우러진 넓은 잔디밭에 이르기까지를 말하며, 옛날에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에 마을주민들이 떠오르는 달을 보며 소원을 빌며 절을 하던 달맞이 언덕이기도 하였다.

또한 아래쪽 무덤가 잔디밭에는 현재로부터 약 20여 년 전까지도 할미꽃, 엉겅퀴, 민들레 등 여러 종류의 야생초들이 이른 봄을 장식하며 자생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멸종되고 없는 상태이다.

두 번째 안내판은 `소탄바위`이다. 안내판의 제목인 소탄바위 글자가 훼손되어 알아보기 어렵다. 의미는 소를 탄 바위라는 뜻으로 옛 사람들이 소의 등에 올라타기 위하여 이 바위를 이용하였다고 전래되어온 이름이다. 유래는 옛 선조들이 여름철에 이곳 동산에 소를 방목하면서 일꾼들이 민가와 멀리 떨어져 주인이 잘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부터 소를 타고 이동하였다고 하며, 그때 당시 이곳은 지금처럼 산림이 울창하지 않았으며 풀이 무성하여 넓은 초원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세 번째 안내판은 `돌티미`이다. 의미는 돌 틈사이라는 뜻이다(돌틈이→돌트미→돌티미). 유래는 붉은 등(위쪽 산마루 일대) 산 줄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이곳은 최근의 등산로 확장공사를 하기 전까지도 크고 작은 바위들이 길 가운데 겹겹이 박혀있었던 곳이다. 한편 옛 선조들이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던 중 이곳에서 확 트인 양산평야(현재의 신도시)와 낙동강을 굽어보면서 쉬어가기를 종종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수풀이 앞을 가리고 있으나 그 당시의 이곳은 나무들이 어려서 앞 전망이 확 트여 있었다고 한다.

네 번째 안내판은 `석류정(石流井) 쉼터`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미는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란 뜻이다. 현재는 오랜 가뭄으로 샘이 말라붙었다. 유래는 10여 년 전부터 계석마을 주민들이 가벼운 등산과 함께 휴식처로 이용했으며, 최근 양산시의 지원으로 두 차례에 걸쳐 확장 보수 공사와 더불어 약수터를 재정비하여 이제는 점차 시민체육공원의 위상을 갖추어 가고 있는 곳이다. 현재의 문제점은 각종 운동기구와 정자까지 있는데, 화장실이 없어 불편한 실정이다.

네 번째 안내판은 `말미`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미는 말의 무덤이란 뜻이다(말묘→말미). 유래는 구전되어오는 설에 의하면 먼 옛날 고려 말 조선 초기에 활약했던 삼장수 중의 하나인 이징규(李澄圭) 장수가 금정산 일대(마애불 바위)에서 수련을 하고 다녔다고 하며, 이때 타고 다니던 애마가 죽어서 여기에 묻혔다고 한다.

삼장수 : 고려 우왕 6년(1380)에 양산시 하북면(삼수리)에 정착한 이전생(조선왕조 개국공신, 태조 7년에 판서를 지냄) 이징석(아호 취봉), 이징옥(아호 원봉), 이징규(아호 금봉) 삼형제 모두가 무과에 장원급제해 종1품의 벼슬까지 오른 장수가 되었다고 하며, 그 후 마을 이름을 삼장수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삼수라 칭하였다고 한다. 양산시지 2004년 상권(2004년 6월 발행) 참조, 2017년 3월 17일.

이징규 장군이 금정산 마애불 근처에서 무예를 연마할 때 말을 타고 다니던 길이 동면 계석마을에서 장군봉으로 가는 등산로이다. 등산로 옆에 이징규 장군의 말 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정산의 금봉탕, 마애불 스토리는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전생이 삼장수를 낳을 때 각각 현몽은 장남 징석은 영취산이 나타나 아호를 취봉(鷲峰), 차남 징옥은 원적산이 나타나 원봉(圓峰), 삼남 징규는 금정산이 나탄 금봉(金峰)이라 불렀다고 하는 사실과 유적도 부합된다. 삼장수와 관련된 유적에 스토리텔링형 안내판을 세우고 생가를 성역화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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