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종때 `메기들` 세금감면해준 고위관리 공덕비
향토사연구회, 물금 가촌 종고개 숲속에서 찾아 복원

지금은 신도시 조성사업으로 사라진 황금 들판의 옛 이름은 `메기들`이었다. 교동앞에서 증산, 호포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양산들이 곡창지대로 이름을 날린 것은 일제시대 이후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에 수리조합이 창설되고 양산천의 개수공사가 이루어진 뒤에야 농토로서 활용되었던 것인데 다시 말하자면 그 이전에는 낙동강과 양산천이 맞닿은 삼각주로 수천년동안 저습지로 버려진 땅이었다.

오죽하면 이름마저 `메기들`이라 하여 메기와 자라가 서식하는 습지로 존속돼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작물이 생산되지도 않는 척박한 땅에 대해 중한 농지세가 부과되자 이 곳 백성들은 대표단을 뽑아 당시 세금을 부과한 한양의 호위청에 항의방문을 하고 군수와 관찰사(지금의 도지사)에게 탄원하기에 이른다.

다행히 이런 내용을 상세히 파악한 호위대장에 의해 면세조치가 내려졌는데 이를 고맙게 여긴 인근 농민들이 뜻을 모아 당시 군수와 관찰사, 중앙의 호위대장에 대한 불망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140년 전의 이런 사연을 담은 공덕비 세 기(基)가 양산향토사연구회(회장 정진화)에 의해 발굴돼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

향토사연구회에 따르면 지역 주민의 제보를 접하고 몇 차례의 공식조사를 통해 비문의 해석과 과거 문헌을 조사한 결과 1866년 당시의 내용들이 확인돼 지난달 26일 물금읍사무소(읍장 김종규)의 장비와 인부 협조를 받아 일시 복원작업을 마쳤다고 밝혔다.

처음 현장조사할 당시 공덕비는 물금읍 가촌리 일명 종고개 청룡등 5부 능선의 북쪽에 호위대장 정공비가 있고 5m 남서쪽에 관찰사 서공비가 있었으며, 또다시 5m 쯤 앞에 군수 심공비가 넘어져 있었다고 한다.

또 비석의 머리돌들은 30여m 떨어진 숲속에 방치돼 있었다고.

연구회원들은 인근에 거주하는 원로들을 찾아 탐문한 결과 정흥모(78,가촌리)씨의 구술에 의하면 "옛 황산 가는 길가에 있었는데 1920년대 수리조합이 생기고 승수로가 만들어지면서 현 위치로 옮기게 됐다"고 한다.

정진화 회장은 "우리의 조상인 메기들 주변 백성들의 고충을 적극적으로 처리해 준 당시 고위 관리들에 대한 민초들의 자발적인 불망비로 드러나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을 가르쳐 주고 있다"면서 "양산에서 가장 큰 들판이었던 메기들이 신도시개발로 사라져 버렸지만 비석들이 자리한 종고개는 근린공원으로 계속 남을 자리이기 때문에 필요한 절차를 거쳐 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해서 보존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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