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는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최대의 인물이라 할 것이다. - 조지훈(한국사상, 1959)

2023년 2월17일 동학예술포럼(단장 김준기: 광주시립미술관 관장)팀과 함께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동학 영남투어를 하게 되었고 5월 11일에는 정읍의 동학농민운동 기념공원을 방문하면서 전북투어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동학예술포럼의 경기도와 강원도 투어는 이미 작년에 이루어졌고 앞으로 전남투어가 예정되어 있으니 이것은 당시에 동학이 얼마나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투어는 전문가들(철학, 역사, 평론, 큐레이터)과 예술가들(화가, 음악가)이 함께 동학이라는 사상의 발생과 그 사상을 바탕으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5월 18일자 신문에 1894년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 기록물이 1960년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과 함께 관련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4.19혁명과 동학농민운동 기록물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자료이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고 본다. 4.19 혁명은 독재에 맞서 비폭력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룬 역사적 사건이었고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시대 19세기 후반에 부패한 지도층과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면서 민중이 봉기한 것으로 한국이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을 만들었던 중요한 사건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이 되었다는 것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자유, 평등, 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이 세계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동학투어에 대한 답사기를 써보기로 용기를 내었다. 지난 시아버님 기일에 수저를 놓는 방향을 두고 시아주버님이 동학에서는 내가 보는 방향으로 둔다는데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을 중시한다는 뜻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동학에서 '향아설위(向我設位)'라고 하여 제사를 지낼 때 자신을 향해 위패와 밥그릇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평소 관심을 두지 않더라도 한두 번씩은 주변에서 들어 보는 것이 동학의 교리이다.

 

동학예술포럼의 영남투어는 1857년 최제우가 49일간 수도한 양산 천성산 내원사의 적멸굴부터 시작되었다. 내원사가 있는 천성산은 원효가 천성산 상봉에서 1000명의 대중에게 화엄경을 강론하여 성인이 천명이 나왔다고 이름이 천성산이 되었다고 하니 신성한 산임에는 틀림없다. 성인 천명이 모두 바위가 된 산이니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선택한 내원사 입구에서 적멸굴까지의 최단거리 코스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의 본관은 경주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최진립(1568-1636)의 7대 후손으로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최진립의 집안에서 아직까지도 모범이 되고 있는 경주 최부자 집과 최제우가 나왔다. 경주는 5000년 우리 역사에서 외래사상에 응전하는 두 가지의 국내사상이 생겨난 곳이다. 신라시대 불교의 대중화와 통합정신을 강조한 원효와 조선시대 동학의 최제우가 그렇다. 최제우는 천주교의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한 시천주(侍天主)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교리를 완성하고 동학(東學)을 창시했다. 사람이 바로 하늩이라는 인내천사상, 곧 양반과 상민, 노비 그리고 남자, 여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인간존중사상과 생명존중사상을 펼쳤다. 실제로 그는 노비를 풀어 준 후 자신의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았다. 경전으로는 <동경대전, 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가 있다. 도올 김용옥은 <동경대전>을 번역하면서 '우리민족의 고전인 동시에 모든 서양철학이 가야 할 오메가 포인트(궁극의 종착점)를 제시하고 있다'고 그 의미를 주장하고 있다. 최제우는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 서양열강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정신혁명을 일으키지 않고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길은 개벽 사상밖에 없다고 보았다. 새로운 논리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최제우는 신과 인간이 평등해야 우리 인간이 진정으로 평등해 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음양이 서로 어울리어 비록 백천만물이 그 가운데에서 화하여 나오지마는 오직 사람만이 가장 신령한 존재이다. <동경대전>

 

이러한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다는 동학의 파급력이 엄청 나자 배척하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관과 유생들의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최제우는 박해를 피해 전라도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에 피신했는데 이때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고 논학문(일명 동학론), 안심가, 교훈가 도수사 등을 지었다. 1863년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2대 교주로 임명한 최제우는 1864년 대구 아미산 관덕정에서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참형 당했다. 이곳은 후에 많은 천주교 신도들이 순교한 장소이기도 하다.

후에 나는 "지리산실상사감로도"를 작업하면서 최제우의 생가가 있는 경주 현곡의 흙과 그의 사상을 정리했던 남원의 흙을 담아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최제우(1933년, 고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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