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극수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박극수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내가 태어나고 자란 명동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지금은 웅상전역이 도시화해 반촌 마을이 되었다. 반만년 이어온 애환과 현대문명이 같이 숨쉬고 있다. 마을이 형성된 유래의 흔적은 5-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고분군이 형성되어 있고 삼국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삼국시대부터 집단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역사 증명 근거는 150여년전 시명사를 건립하면서 발굴된 약사여래불이 신라말 고려초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당산나무(느티나무) 수령이 800여년으로 추정하며 나무를 심은 분은 원씨 성을 가지신 분이 심었다 전해오며 일명 원정자라 한다. 조선 초중기에 생산한 도요지터가 여러곳에 산적해 있고 제련터(점터)가 있다.

마을에 정착하여 오늘까지 명맥을 이어온 가문은 1500년경에 입향한 울산박씨 가문이 있고, 1700-1800년 경에 입향한 학성이씨, 광주안씨, 안동권씨, 고령김씨, 달성서씨, 밀양박씨들이 수십세대부터 십여세대 살아가고 있으며 20세기부터 많은 성씨들이 같이 생활한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1500여년 전부터 큰 마을을 이루어 사회적 신분도 고위층에 속한 분들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순수 농촌마을로 형성되었던 2000여년경까지 웅상9개 이동 마을 중 거주민은 주남과 비슷한 200여 세대가 넘었고 농경지 면적도 비슷하여 웅상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500여년전 입향한 울산박씨 박지영께서는 웅촌면 대복리에서 출생하셔 대과에 급제하여 무안군수를 역임하시다 당파싸움에 혈안이 된 벼슬아치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명동마을에 정착하여 후진들에게 문무를 훈화하며 권력 가진 관료들이 나라를 버려도 백성마저 나라를 버리면 안된다는 훈화에 혼신을 다했다.

정신을 이어받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에 출병하여 울산선무원종 임란공신에 녹훈되어 충의사에 배향된 친족은 열네분이시다. 아들 박홍남(훈련원봉사), 조카 박홍춘(서면장. 기장현감. 훈련원주부. 감포만호), 종손자 박계숙(선전관자헌대부. 훈련원정), 종질 박경은(팔도병사 박이명의 아버지. 숭정대부. 판돈령부사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박응정(훈련원봉사), 박인복(훈련원판관), 박경열(훈련원첨정), 박응춘(훈련원부장), 박영록, 박영준(전응충장군의 처남. 훈련원정). 울산 북구 연암동에서 출생하시고 김유신 장군의 후손이신 사위 김응방(훈련원판관. 통훈대부사복시정), 생질 학성이씨 주남입향조이신 이겸수(기장현감. 정주판관) 사명대사를 보좌하며 고니시유키나가와 가토기요마사 사이에 내분을 일으키는 이간책도 시도하였다.

안동권씨 권률장군의 후손이 1700년경 강화에서 명동으로 정착하여 집성을 이루어 지역에 헌신하고 있다. 광주안씨 울산망성입향조이신 안신명(선전관. 훈련원판관.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께서는 숙부 안수, 당숙 안근(주부), 제종 안시명(훈련원주부), 안이명(당포만호, 가리포첨사)과 같이 의병으로 출전하였으며, 후손이 1700년경 울산에서 명동에 정착하여 집성을 이루어 마을 화합에 앞장선다.

달성서씨 서인충(어모장군. 훈련원정. 부산진수군첨절제사), 서몽호(훈련원주부)의 후손들이 1800년경 울산 다전과 웅상 매곡에서 명동에 정착하여 집성을 이루어 지역발전에 협력하고 있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받칠 각오로 의병에 출병한 선조들의 후손답게 해방이후로 웅상에 자랑스러운 일을 이룩할때마다 임란공신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이룬 일이 많다.

보도연맹 가입자 전원 학살령으로 전국 어느곳 없이 한명 남김 없이 모두 학살되었으나 유일하게 웅상보도연맹 가입자 300여명은 전원 구출되었다. 오강환 선생님의 살신성인의 의지와 용기를 행동 할 수 있게한 분들도 임란공신 후손들이였다. 6.25동란 중에 정부는 기존학교 유지도 버거운 처지에 정부가 사립학교 신설에 전혀 도움 줄 수 없는 시기에 임상수 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많은 사재를 들여 개운중학교 건립을 할 때 큰 힘이 되어 도움을 주신 분들 중에는 우리마을 임란공신 후손들이 많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수원보호구역 지정계획 확정을 하고 해지된 곳은 웅상이 대한민국1호다. 만약 웅상이 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면 현재 웅상인구는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고 땅값 역시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태원 봉우아파트 일대 식수와 생활용수 고갈시 시명골저수지 물을 공급하고 시명골저수지 수혜 농지 전역을 주거지역으로 지정하여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할 수 있는 여건 조성도 웅상출장소 부지, 문화체육센터 부지 확보 조성도, 명동공원 부지 조성도 언급한 일들에 임란공신 후손들이 불씨를 지피고 중심이 되었다. 웅상 당면한 사안과 향후 발생할 일에도 선조들의 정신에 부끄럽지 않은 생각과 행동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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