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자란 고향 부곡은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같은 모양의 집들이 나란히 서 있던 예전의 동네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철도청에 근무하는 이들을 위한 관사가 100호나 세워져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구조였습니다. 목욕탕도 있고 지하실도 있는 일본식 구조였는데, 그런 집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서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은 관사가 대부분 헐리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습니다. 눈을 감고도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어릴 적 기억을 두고, 지금은 도대체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동네 서쪽 편에 있던 저수지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월암리와 입북리와 초평리에 걸쳐 펼쳐진 큰 저수지였습니다. 동네에 다른 저수지가 더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릴 적 우리는 그냥 저수지라 불렀는데, 지금은 왕송호수로 불리더군요. 호수 주변으로는 바이크 시설이 설치되어 외지에서도 찾아오고 있고요.

어릴 적 저수지는 큰 운동장과도 같았습니다. 여름에는 수영을 하고, 조개와 우렁이를 잡고, 긴 줄기를 따라 물속에서 자라는 마름을 캤습니다. 겨울에는 겨울대로 동네 운동장이었습니다. 얼음이 꽝꽝 얼면 나무를 깎아 팽이를 돌리고, 외발 썰매와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습니다. 제 몸이 어는 것에 대한 통증인지 저수지 얼음장이 쩡쩡 우는 소리를 경외감으로 듣기도 했습니다.

겨울철 얼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썰매를 타다가 심심하면 조개를 잡기도 했습니다. 저수지가 얼 정도이니 저수지 곁에 있는 논은 당연히 얼음이 얼었는데, 우리는 조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얼음 밑 흙 속에 있어 보이지도 않는 조개를 어찌 잡을까 싶겠지만, 방법이 있었지요.

조개가 있는 곳 바로 위에는 조개가 숨을 쉰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만히 얼음 위를 살펴보면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생긴 무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무늬 주변으로 손이 들어갈 만큼 얼음을 깨고 손을 넣으면 조개가 잡혔습니다. 자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만이 알 수 있는 일로, 얼음장 아래에 있던 조개로서는 기가 막힌 일이었겠다 싶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입춘'의 시간을 맞습니다. 느낌이 그런 것인지 실제로 그런 것인지, 어디선가 봄기운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햇살도 조금 더 밝고 따뜻해진 듯싶고, 바람도 한결 순해진 듯싶습니다.

어릴 적 조개를 잡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얼음장을 녹이는 것은 따뜻해지는 햇살이나 순해지는 바람만이 아니겠구나 싶습니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막 벙글기 시작할 꽃봉오리의 금 가는 소리일 수도 있고, 노루 꼬리만큼씩 길어지는 밝음의 기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음장을 녹이는 것 중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얼음장 밑에서 숨을 쉬는 누군가의 호흡, 그것이 물고기든 조개든 그 무엇인가가 숨을 쉬는 작은 온기 또한 얼음장을 녹이겠지요. 이 시대의 얼음장을 녹이는 것 역시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 한 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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