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나이를 알면)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리인)

자왈 부모지년 불가불지야 일즉이희 일즉이구 (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則以喜 -則以懼)
해석: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님의 나이는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으로는 기쁘기 때문이요, 한편으로는 두렵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님의 나이가 올해 팔십을 넘겼다고 하면 기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오래 사셔서 기쁘기도 하지만 이제 팔십을 넘었으니 자식들과 헤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두렵기도 한 것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퇴계 선생님은(1501-1570) 1501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보 이씨 가문의 아버지 이식과 어머니 춘천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덟 남매의 막내인 퇴계 선생님은 두 살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 박씨 슬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집안 형편은, 맏형인 잠(潛)이 장가를 들었을 뿐 아래 여섯 명은 아직 어려 어머니 혼자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형편이었다. 나라에서 내리는 부역과 세금이 혹심하여 다른 집은 살림이 결딴났는데도 어머니는 먼 앞날을 내다보고 살림을 살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비록 살림은 가난했지만 어머니 박씨는 남들로부터 '과부의 자식은 배운 게 없고 버릇이 없다'며 따돌림을 받을까 봐 남들보다 몇 배 공을 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매우 엄한 교육을 했다. 문자를 배운 적은 없지만 평소에 들은 아버지의 가르침과 여러 아들들이 공부하는 내용을 들어서 조금 깨우쳐 이해하는 것이 있었다. 세상의 일을 처리할 때는 배운 자식들보다 탁월한 면이 있어서 선비나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어머님의 이런 교육 덕분에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34세에 과거를 보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생님은 홀로되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벼슬 자리를 지방으로 옮기려고 하던 즈음에 그만 37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만다. 그 슬픔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3년 상을 치르면서 몸에 병이 나서 목숨을 구하지 못할 뻔하였다고 한다. 팔 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서 아버지는 얼굴도 모르는 두 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이제 막 모실만 할 때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부모님의 나이는 공자님의 말씀처럼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것 같다.

필자는 아버님과 20대에 사별하였고, 어머님은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팔십 네 살로 고향에 계신다. 퇴계 선생님처럼 필자의 어머님도 공부는 많이 못했지만 일처리 하는 것을 보면 많이 배운 우리보다 훨씬 현명한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님 덕분에 편안하게 살고 있다. 그러므로 어머님께 더욱 효도해야 하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주 찾아뵙고 말동무도 되어주고 맛있는 것도 사 드리고, 밭일도 함께 하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래도 잘 안되는 게 있다. 바로 공자께서 말씀하신 '부모님을 모실 때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子曰 色難, 爲政)'고 한 것이다.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정성을 다해서 모시려고 하지만 힘든 경우에 순간 어긋나고 만다. 타고난 성격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시골집 대문을 들어설 때마다 늘 오늘은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모시자고 거듭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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