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극수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박극수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대운산(大雲山)의 옛 지명은 불광산(拂光山)이였다. 지명의 유래는 두 지명 다 부처님의 광명이 비친 산이라는 의미와 하늘의 서기가 서린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광산(拂光山)이란 지명은 동국여지승람과 옛 울산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어느때부터 대운산 이란 지명으로 변경되었는지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조선중기쯤으로 추정된다.

동으로는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온양읍, 남으로는 정관읍, 북으로는 웅촌면, 서편에는 매곡동, 덕계동, 명동, 삼호동, 용당동이 접해 있다. 정상의 높이는 742m이다. 산 정상에서 보면 동쪽으로는 동해바다가 발 밑에 있는 듯 보이며 날씨가 좋은 날은 대마도까지 보인다. 서쪽으로는 천성산과 정족산이 가까이 보이고 그 너머 영축산, 신불산, 가지산, 운문산 등 영남알프스 고봉들이 북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는 달음산, 금정산이 조망된다.

대운산에서 발원된 물은 매곡저수지, 명동시명골저수지, 남락골저수지, 소매골저수지, 삼용저수지, 탑골저수지 등 크고 작은 저수지에 담수되었다 농업용수와 식수와 생활용수를 제공하고 회야강에서 천성산에서 발원된 물과 합류하여 북으로 흘러 회야댐에 들어가 울산시민의 식수가 되기도 하고 동해바다로 흘러간다.

웅상과 정관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용천산(龍天山)) 일명 솟슴산 지명 유래는 용이 하늘에 승천하기 위하여 트림을 하는 형국이라 하여 지어진 지명이며, 시명산(時鳴山) 닭의 울음소리가 한번씩 들렸다 하여 지어진 지명이다. 명동과 덕계 경계를 이루고 있는 천마봉은 하루 천리를 달리는 말의 형국이라 하여 이름하였고 온양읍 웅촌면 웅상과 경계를 이루는 배읍봉(拜揖峰) 일명 배일봉은 신라시대부터 국태민안의 제사를 모셨던 우불신사를 향해 공손하게 읍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 지어진 지명이다. 탑곡은 오랜 옛날 문화유산으로 가치 있는 탑을 건립하여 부처님을 모신 절이 있었던 곳이다.

대운산 많은 지명마다 의미가 담긴 지명이라 일일이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관계로 략함이 아쉽다. 고분군, 도요지터, 제련터 흔적과 지명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곳이 여러곳에 있다. 불광산(拂光山)이란 지명이 가진 의미처럼 부처님을 모시다 폐사된 곳의 지명 불당골, 절골이란 지명을 가진곳이 여러곳에 있다. 대운산 동편쪽에는 원효대사께서 창건하였다는 장안사와 당나라 태화사와 원효대사의 전설이 담긴 천판암이 있고 신라후기 고봉선사가 창건하였다는 내원암이 있다.

명동 시명산에는 천여년 전부터 절터였음을 확인 할 수 있는 신라말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약사여래불이 칠성각 건립공사를 하다 발굴되어 모셔져 있는 시명사가 있다.

매곡 천불사는 1970년경 도봉스님이 바랑과 지팡이만 들고와 천막을 치고 기도하다 불교성지를 이루었다. 대운산 자락에 터전을 이루고 살던 백성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산 선무원종 임란공신 매곡동 서용호, 명동 박홍춘, 박홍남, 용당동 박경은은 선봉장이 되고 이분들의 모든 친척분들과 마을분들 중 노약자와 여인들을 제외하고 혈기 있는 남자들은 모두 의병이 되어 나라와 고장을 지켰다.

공신들과 의병들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배향한 사당은 매곡증산사, 명동 귀후재, 태화동 학산서원이다. 울산박씨 시조 박윤웅과 고려말 충청감사를 역임하다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72현인과 뜻을 같이 하여 절개를 지킨 박추를 모신 용강사가 있다.

울산 양산 일대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면에서나 예술성이 뛰어난 울산박씨 용당파 종택이 500여년 17대째 거주하며 4대 연속으로 대과에 급제하고 울산고을에서는 가장 많은 노비를 거느리며 권세도 누리고 임진왜란 시에는 모든 친척과 노비들도 모두 의병에 출병토록 하고 전투에 소요된 모든 경비를 사재로 감당하였으며 통신사 일행과 관료들의 출장시와 어떤 행인들도 귀천의 분별없이 성심으로 환대하며 숙식을 제공하였고 자녀 교육을 위한 서당을 건립하여 초빙한 훈장에게 인근마을 학동들과 노비 자녀까지도 자녀들과 차별없이 동일하게 수업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그 시대 양반으로서는 보기드문 진보적 의식을 가진 가문이었다.

애석하게도 가세가 기울어 1980년경 종택이 매도되어 헐리고 말았다. 용당 역사 복원사업에 중점으로 추구해야 할 사업이다.

6.25동란이 발발된 즉시 대운산에는 공비 1개 중대 병력이 주둔하였다. 이들은 6.25 동란 중에도 군경에 항전을 지속적으로 했고 휴전협정 이후에도 반여년 지난 시기까지 존속하다 많은 병력이 투입된 특별소탕작전에 의하여 소탕되었다.

공비 부대는 전쟁물자 공급 받기가 어려운 때가 많아 의식주에 필요한 생필품을 대운산 주변 주민들을 통해 구했다. 주민들은 공비들의 총기 위협에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요구하는 물품을 빼앗긴 처지로 인하여 대운산 주변 주민들 중 많은 주민들은 본인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공비 협조자로 몰려 보도연맹 의무가입 대상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웅상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 할 수 밖에 없었다.

전국 보도연맹 가입자 전원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학살하라는 명령에 의하여 자신도 모르게 가입자 명단에 등록된 사람들도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체포되어 경찰서장 직권하에 집단 학살했다. 이런 가운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웅상보도연맹가입자 전원은 학살직전에 모두 구출되었다.

당시 서창 지서장 오강환님은 웅상보도연맹 가입원서와 명부 일체를 소각해 버리고 본인은 계엄사령부에 총살당하기 위하여 자진 출두하였다. 구출된 인원은 세월호 희생된 인원보다 더 많은 인원이라 했다. 오강환 선생님과 이 뜻을 도운 분들은 타이타닉호 침몰 순간의 선원들의 희생정신보다 더 숭고하고 위대한 정신으로 임한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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