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떠나기 위해 챙 넓은 모자를 샀다

그을린 얼굴은 이미 오래여서

하늘을 가린다고 나아지지 않겠지만

챙 넓은 모자가 고마운 일은 있다

된땅을 파다 보면 목덜미 따끔거려

자주 허리를 펴는 불편함도 덜고

땡볕에 부신 눈을 숨기기도 좋다

땅 파는 일이 부끄러운 노동은 아닐진대

그래도 넓은 챙 아래 코끝을 숨긴다

쳐다보는 시선 감출 수는 없지만

실직으로 비굴해진 눈빛이 숨겨지고

보기 싫은 얼굴 애써 피하지 않아도 좋다

먼 거야할 길에 익숙해지기 위해

구덩이 속으로 펴지 못한 몸을

자꾸만 낮아지는 길에 따라 붙였다

챙 넓은 모자는 어느 덧 뉘엿뉘엿

낯익은 풍경 속으로 물입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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