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극수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박극수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국가나 지방의 문화 발상지는 대다수 강변이다. 회야강변에도 신석기시대부터 집단생활을 하였다. 신라가 개국되기 훨신이전부터 현 웅상, 웅촌, 청량, 온양, 온산, 서생 일대의 부족민들은 협력하여 우시산국이란 부족국가를 세워 살아오다 신라 석탈해왕 시대에 신라에 귀속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신라말기 호족세력의 힘이 강해 신라가 쇠퇴해 갈 때 웅상지역을 포함한 울산 일대를 다스린 호족(호족장 박윤웅)은 어느 호족보다 강한 호족이었다.

호족장이 용맹스럽고 지혜로워 탁월한 지도력으로 호족을 다스렸다. 회야강변과 태화강변에 넓은 들이 펼쳐져 풍족한 곡식을 수확하고 동해바다에서는 넉넉하게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었고 양질의 많은 철이 매장된 노천 철광산 달천광산이 있었으며 많은 소금을 생산하는 염포 염전이 있고 좋은 철을 이용하여 신예무기, 신예 농기구와 생활용품을 제작하는 기술이 발달하여 넉넉한 자원을 교역하는 큰 무역항을 개항하여 세계무역을 하고 태화강, 회야강 상류까지 배가 왕래하여 인적 물적이동이 용이하여 번창하고 힘이 강한 호족이었다.

호족장 박윤웅은 고려왕건과 제휴해 호족과 고려가 병합하여 신라가 국운을 다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박윤웅은 고려개국 공신이 되고 울산고을 지명은 고려를 부흥하게 한 지역이라는 의미를 담은 흥려부란 지명을 하사 받고 박윤웅은 흥려부사로 임명받아 많은 식읍지를 받아 지역을 다스렸다. 그중 미역바위는 천년이 지난 지금도 문중소유다. 만여년 전부터 회야강변에서 집단생활을 해온 흔적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다.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된 지역은 웅상출장소 주변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출토되었다. 고대 돌무덤은 웅촌면 은현에 대형 적석총이 일부 훼손되고 원형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웅촌면 반계 운흥동천가에는 많이 훼손된 상태의 적석총이 있다. 삼국시대 5-6세기경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은 명동고분군, 삼호고분군, 웅촌대대고분군, 온양중광고분군, 외광고분군 등이 있다. 성터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삼국시대 건립한 우불산성, 배읍봉 정상에 있는 성터, 온양 대운산성,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우리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건립한 서생성, 신라때부터 전국에서 가장 풍수지리설이 뛰어난 곳에 단을 설치하여 국태민안의 제사를 모신 곳 중 한곳인 우불산신사,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미타암 유라시아 대륙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라 발표된 천성산에 위치해 동해바다에 해 솟음과 동시에 국가 보물 998호로 지정된 아미타여래불이 모셔져 있는 석굴에 햇빛이 비취인다. 지금은 폐사가 되었지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웅촌면 반계 운흥사의 규모가 통도사보다 더 크고 재정도 튼튼하였다 한다.

통도사는 만석을 수확하였으며 운흥사는 삼만석을 수확하였다는 기록이 해인사 경판에 기록되어 있다. 운흥사에서 임진왜란시 사명대사가 승병을 지휘하며 서생 왜성장 가토기요마사와 협상을 하였다. 동학교주 최재우가 기거하였으며 동학혁명군에 운흥사가 재정지원을 하였다 하여 왕실에서 소실하였다는 구전이 전해온다. 절터 흔적은 울산시 문화재로 지정하여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다. 고려시대 황산역 산하역으로 정관읍 월평에는 이월역이 있었고 명동에는 원터(주막각단)가 있었으며 웅촌 곡천에는 간곡역이 있었다.

웅상은 신라때부터 지금까지 교통 요충지이다. 우시산국의 도읍지 검단유적지가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은 울산박물관에 소장관리되고 있다. 울산 박씨 시조 박윤웅과 고려말 충청 감사를 역임하다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동72현인들과 뜻을 같이하며 절개를 지킨 박추를 배향한 용강사가 있다. 4대로 대과에 급제하고 울산지방에서 노비를 가장 많이 거느린 집안으로 규모면에서나 예술성이 영남일원에서는 가장 뛰어난 울산박씨 용당파 종택 17대 500여년간 거주하며 권세도 누리고 국가에 충정을 다한 가문으로 임진왜란때 모든 친족과 노비들을 의병에 출병토록하고 전투에 소요된 모든 경비를 사재로 다 감당하였다.

통신사 일행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많은 출장관료들에게 도움을 주고 어떤 행인도 귀천을 분별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숙식토록 하고 떠날 때 노자까지 챙겨주었다 한다. 자녀 훈육을 위한 훈장에게 자녀와 인근 마을주민 자녀와 노비 자녀까지 같이 공부하게 한 진취적 의식을 가지고 행동했던 가문이었다. 종택은 1980년대까지 존치되어오다 가세가 기울어 매도하여 훼손되었다 문화재로 보존되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유산이었는데 너무 애석하다.

조선초부터 임란 전후에 도자기를 생산하던 도요지터와 철을 제련한 점터가 곳곳에 산적해 있다. 우리지역의 사기장들도 일본에 많이 끌려갔다.

임진왜란때 의병으로 출병하여 의병장으로 전투를 지휘했던 박홍춘, 황민중, 서몽호, 이겸수, 박홍남, 박경은 이 어른들의 공적과 배향된 사당 잠들고 계신 산소를 필자는 너무 잘 안다. 교육기관인 석계서원, 자암서원, 남강서원, 서원을 능가해 후진 양성을 했던 백동정사, 주강정사, 흥학재 등 유적지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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