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感性)도 늙는구나. 삭막한 겨울을 하얗게 수놓는 눈이 내리면 설렘 보다 눈 치우기 걱정이 앞선다. 편편히 흩날리는 눈송이 따라 너울너울 춤추던 환상은 사라지고, 계단을 내려가다 미끄러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고개를 든다. 비는 싫어해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데 눈은 낭만이 아니라 노동이 되어 싫어졌다. 눈이 내려 겨울을 좋아했는데 눈 때문에 싫어졌으니 아이러니하다.

올겨울엔 유난히 눈이 잦다. 밤사이 눈이 내리면 6시 못 미쳐 일어나 단독주택에 노출된 계단의 눈부터 치운다. 계단은 각이 져 눈 쓸기가 거추장스럽다. 마당에 쌓인 눈도 마찬가지다. 골목의 눈은 밀대로 밀면 오히려 편하고 빠르다. 일찍 나가면 이웃집 앞까지 쓴다. 어쩌다 늦거나 종일 눈이 내리면 나보다 연세 많은 분들이 부지런을 피워 미안해진다.

눈 내린 뒤 외출도 신경 쓰인다. 겨울철 빙판길 낙상사고의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넘어지면 골절이나 타박상을 입기 일쑤다. 넘어질 때 반사적으로 손을 짚거나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상처를 입는다. 뼈와 근육이 약한 노인들에겐 빙판길 낙상은 치명적이다. 외출할 땐 반드시 장갑을 껴야 넘어져도 덜 다친다. 폭설에 의한 고속도로 추돌사고는 인명피해로 이어진다. 폭설에 시설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농작물 피해가 만만찮아 눈이 재난이 됐다.

한반도에 눈이 잦은 이유는 뭘까? 열대 동태평양 표층 수온이 평년에 비해 높은 엘니뇨현상과 지구 온난화 영향이다. 대기는 차가운데 바닷물은 따뜻하여 한반도로 수증기가 많이 유입되어 눈이 많이 내렸다는 기상청의 설명이다. 따뜻한 겨울 날씨가 기습 한파나 폭설, 폭우 등 이상기후 현상으로 이어진다는 전망이니 날씨의 심술을 더 겪어야 봄을 맞을 것 같다.

지구촌 곳곳도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 전역에 한파 경보가 내렸다. 체감 온도가 영하 56도까지 곤두박질쳤다. 눈 폭탄에 경기장이 파묻혔고 옥외행사가 취소됐다. 사망, 정전, 도로 폐쇄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북유럽 지역도 기록적 한파로 교통이 마비되고 정전 피해를 입었다. 스웨덴과 덴마크도 돌풍과 폭설 피해로 기후 재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구가 뜨거워진 것은 온실가스 배출 등 환경을 오염시킨 인류의 탓이다. 기후가 인류에 앙갚음을 하는 것 같다.

제설작업이 귀찮아 눈이 싫어지긴 했어도 함박눈 소리 없이 내리면 가슴이 푸근해지고 따스해진다. 고궁의 골기와에 하얀 이랑을 이루고, 청솔가지에 탐스러운 눈꽃을 피우면 늙어가는 감성이 꿈틀거리며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릴 들으며 눈길을 걷거나 눈밭에 뒹굴고 싶은 충동이 든다. 눈은 백의(白衣)를 입고 찾아오는 반가운 겨울 손님이다.

나이가 들면 활력이 줄고 실의에 빠지기 쉽다. 신체적 성장이 멈추듯 정신적 시계가 느리게 돌며 허무가 피어오른다. 무기력하고 무감동해지면서 사람과의 관계는 물론 자연과도 소원해진다. 그럴수록 봄의 꽃과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 겨울의 눈과 가까워지는 자연친화적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자연과 친구가 되면 메말라가는 감성에도 새순이 새록새록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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