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새해 아침의 일이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옥수동 달맞이공원에 올랐다. 전날만 해도 나 혼자이거나 고작 몇 사람 정도가 공원을 거닐거나 해맞이를 하곤 했는데 새해 첫날은 벌써부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새해 첫 태양이 떠오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은 흐렸고, 일출시간은 다가오는데 사람들은 행여 첫해를 만나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듯했다. 이번엔 못보겠구나 하며 많은 사람들을 뒤로 하고 공원을 내려와 한강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아뿔싸, 그제야 첫해가 구름을 뚫고 올라와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작은 후회가 일었지만 한강에서라도 첫 일출을 온 마음으로 맞았다. 그깟 일출, 어디서 보면 어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공원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견딜 용기'가 있었기에 찬란한 일출의 행복감을 맞보게 되었으리라.

새해가 되니 이런저런 결심을 하면서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운동, 금연, 책 쓰기, 작년에 미뤄놓았던 계획 등등. 그런데 한 해 말이 되면 언제 그런 결심을 했냐는 듯이 제대로 한 것이 없는 빈손으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왜 그럴까? 바보들은 늘 결심만 한다더니 바보라서 그럴까?

순간 몇 해전 상영되었던 박해일, 탕웨이 주연의 영화, '헤어질 결심'이 생각난다. 뭔가를 하려면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게 결심으로 끝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허점이 보인다. 결심과 실행 사이에 구멍이 뻥 뚫려있다. 바로 용기였다. 결심까지는 머리가 후다닥 해치우지만 그다음은 가슴과 손과 발이 해야 할 몫이다. 가슴과 손과 발이 움직이려면 끈기 있게 하고야 말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용기는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용기가 잉태할 수많은 반복적인 연습과 훈련에 의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하다. 귀차니즘과 타협주의를 물리칠 튼실한 근육 말이다. 거기에 그런 과정을 통해 생겨난 용기도 때로는 흔들리는 갈대처럼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다. 용기가 나 자신에게 잘 녹아들도록 거기에 깨어있어야 한다. 대신 그 용기가 있어 실행으로 이어지면 그 과실은 그 어떤 기쁨보다도 크다.

행복도 그렇다.

지금 내게 행복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변화할 용기'가 필요하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일상에서 벗어날 과감한 용기 말이다. 내가 하는 말, 생각, 행동에 작은 변화라도 주면 행복의 물꼬가 트인다. 행복을 발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상을 자상한 눈으로 살필 용기가 있어야 내가 가지고 있는 행복의 발견으로 이어지니까.

벌써 새해가 며칠이 지났다. 실천을 놓쳤다면 작심삼일이라 했으니 다시 새로운 작심삼일이 시작될 때가 지났다. 새로이 시작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 누구의 시선이나 기대에 매이지 말고 행복할 결심을 하고 실행의 용기를 내보시라.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게 행복이다. 당신은 행복할 자격이 충분하니까. 새해에도 행복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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