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북방의 범, 고구려를 불러들이다.

"좋은 계책이기는 헌데 어떻게 고구려를 우리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겠소."

아진왕이 아무리 생각해도 고구려를 움직일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고구려왕 흥안(興安)은 품은 뜻이 크고 웅대하지만 새롭게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신진 귀족들에 의해 그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작년 왕의 강력한 지지세력인 동부 대인이자 욕살인 연자유(淵子遊)가 대대로(大對盧)로 선출되고 난 이후부터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대대로의 강력한 지원을 토대로 선대왕 이후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 국정의 주도권을 되찾아 지금은 고구려의 태왕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사옵니다."

고구려왕 흥안은 고구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번영기를 이끈 문자명왕(文咨明王)의 맏아들이었다. 그러나 선대왕의 유고로 태자인 흥안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맞이한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광개토호태왕, 장수태왕시절의 활발한 정복전쟁을 통해 공을 세워 세력을 형성한 오부(五部) 귀족들로 인해 왕권이 크게 위축된 상황이었다. 광개토호태왕과 장수태왕시절에 급팽창된 고구려의 영토는 문자명왕시절에 더욱 공고화 되었다. 이런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고구려 조정은 전국을 동부(東部), 서부(西部), 남부(南部), 서부(西部), 내부(內部) 등의 5부(五部)로 나누고 그 책임자로 욕살(褥薩)을 파견하였다. 욕살의 권한은 막강했다. 고구려의 광역행정단위의 장이나 다름없던 욕살은 담당 지역의 행정권은 물론이고 군사권도 가지고 있어 고구려의 최고의 무관직인 대모달(大模達)을 겸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욕살은 독자적인 군사작전이 가능했다. 또한 욕살은 5부의 제가회의(諸加會議)에 참여해 고구려의 제1관등이자 수장직이라고 할 수 있는 대대로를 선출할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문자명왕 이후에 왕권 약화는 대대로의 권한 확대로 이어졌고, 이는 정치적 실권이 대대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연자유는 동부의 대인이자 욕살이었고, 그는 훗날 고구려의 대막리지에 오르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증조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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