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극수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박극수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 이웃 마을에는 오랜 옛날부터 끼니때마다 밥을 구걸 해 이 밥을 먹고 생명을 이어가는 분들이 큰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마을이 있었다. 보릿고개가 가시기 전 1970년 초반경까지 이 마을이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닌 그 마을 이웃에는 한센병(나환자)을 앓고 있는 분들이 몇 분 있었다. 나의 가치 기준에 의하면 우리 마을 가장 큰 자랑거리가 걸인분들과 한센병을 앓고 있는 분들과 바로 이웃마을을 이루며 아무런 불편한 관계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관계처럼 잘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걸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요건은 인접한 마을 주민들이 음식을 나누어 줄 만한 경제적 여유를 가져야 하고 아니면 내가 부족해도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나누어 줄 만한 훈훈한 마음에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어야 밥을 얻어먹을 수 있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과 병든 사람에게 측은지심을 가진 분들이 사는 마을이 아니면 어울려 살아 갈 수가 없다. 명동(옛지명 : 홈실, 명계, 명곡) 옛 마을이 형성된 곳은 명동 시명골 저수지 아래 현 화성아파트와 삼한사랑채아파트에서 중앙병원, 볼링장 일원까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다. 발굴된 유물과 가족이나 삶의 흔적을 보면 5-6세기경 부터 마을을 이루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필자의 12대조 박지영(朴之榮)께서는 무안군수를 역임하시다 당리당략에 혈안이 된 벼슬아치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고향마을 웅촌 대복 근처 마을인 명동마을에 1500년 초반경 정착하여 밀양손씨, 광주안씨, 학성이씨들과 불가분한 관계의 연을 맺어 마을을 이루어 생활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6대조 할아버지 4형제분 중 맏형이신 래팔(來八)과 둘째형이신 문팔(文八) 할아버지께서는 1700년대 회야강 건너 백동(옛지명 : 백홈)마을에 이거하셔 사재로 중등교육을 하는 백동정사를 소주동 379번지 일원에 건립하여 문중 어른들이 훈장이 되어 인근마을 많은 학동들을 모아 인성교육과 문자교육을 훈시하셨다. 정사가 존립한 기간은 해방이후 6.25동란 때까지 존속 운영되었다. 얼마나 많은 선비를 배출하였는지 백동 인근 마을에 가 글자랑 하지 말라는 소문이 울산 고을 전체에 잘 알려진 소문이었다. 걸인 마을이 있는 동쪽마을은 명동마을이고 서쪽마을은 백동마을, 남쪽마을은 주진마을, 북쪽마을은 서창마을이다.

명동마을은 마을 입구에서 마을 끝나는 곳까지 마을길 전체가 보도블록으로 깔려있고 마을 전체 가옥들이 저택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마을길로 뻗어 있는 처마로 큰비가 내리는 장마철에도 우의없이 비한방울 맞지 않고 흙탕물 한방울 튀지 않고 마을 전체를 다닐 수 있었다 한다.

백동마을도 들이 넓어 풍족한 마을이었으며 주진(周津)마을까지 동해바다에서 회야강 따라 배가 왕래하는 나루가 있는 마을이라 많은 물자가 교환된 마을이었고, 서창마을 지명은 조선 초기부터 조세로 수납한 양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 서창(西倉)이란 지명을 가진 마을이다.

조세창고가 설립된 동기는 지역에서 조세로 수납할 양곡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세 양곡이 많다는 것은 주민들이 생산한 양곡량이 많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걸인 이웃마을의 특색이 큰 대문을 달고 사는 집이나 삽짝문(사리문)으로 사는 집이나 모두 새벽이 되면 문을 열고 이웃간에도 맘대로 왕래하고 특히 걸인들이 밥때가 되면 밥을 얻기 위하여 오는 걸음에 방해가 될까 걱정되어 모두 문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흉년이 들면 인근마을 걸인들만이 아닌 멀리 사는 배고픈 사람들이 우리마을에 엄청 몰려와 구걸을 했다고 한다.

끼니때마다 밥 빌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줄 밥이 부족하면 엄마는 당신이 들고 게시던 밥을 걸인에게 주고 당신은 굶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엄마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온 마을 집집마다 그랬던 것으로 안다. 걸인 마을에 사는 분들은 배고프고 잠잘곳이 없는 사람이 찾아오면 어느때 누구라도 반기며 얻어온 밥을 나누어 먹고 잠을 재워주고 밥 얻어러 갈 기력이 없는 분들을 모시며 생활한 마을이다. 보시중에 큰 보시를 행하며 산 분들이었다.

보릿고개가 지속되고 있던 시절 형편이 좋다는 마을에도 몇 집을 제외하고는 식량이 부족하여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고 비싼 이자를 물어야 하는 장이쌀을 빌려 끼니를 해결하였음에도 걸인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훈훈함은 백동정사에서 참다운 선비 인성교육을 받은 학동들의 정신이 실생활에 행함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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