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것은

금수암의 대웅전.
금수암의 대웅전.

 

금수암은 세심교를 지나 자장암으로 가는 길로 접어 들어 조금가다가 오른쪽 좁은 길로 오르다 보면 나타난다. 입구에는 '수행도량으로써 일반인의 출입을 일체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말 그대로 엄숙하게 서 있다. 필자는 일반인 인지라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한참을 서 있는데 스님의 인기척이 나길래 용기를 내고 들어갔다. 사실은 지난번에도 왔다가 발길을 돌린 적이 있어 이번엔 기어코 큰일을 칠 욕심이었다. 나름 큰 용기를 낸 것인데, 필자를 본 스님의 첫마디가 "시간이 괜찮으면 차 한잔하고 가시지요?" 이게 웬 행운인가. 허락 없이 불쑥 들어온 불청객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이라니.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의 문(門)이란 경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이곳과 저곳을 연결시켜 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문은 단순히 열고 닫는 단순한 기능을 넘어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소통의 역할로 우리 일상사의 창구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사찰(寺刹)의 문은 부처님의 세계, 진계(眞界)로 들어가는 입구로서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문은 세속과 불가를 구분하는 '경계'가 아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고 안내하는 '가르침'으로서의 안내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의 문은 무명(無明)과 무지(無智)가 가득한 '불각(不覺)의 세계'에서 지혜가 함께 하는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안내자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필자가 두려움을 안고 들어선 문 안에서의 따뜻한 '차 한잔'이라는 말은 무지(無智)에서 편안한 피안(彼岸)의 세계로 들어온 듯 얼떨떨했다. 사바세계 저쪽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가 피안이라면 금수암은 충분히 그런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와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조화로운 합창은 산사에서만 접할 수 있는 보물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금수암 입구에서 본 내부전경.
금수암 입구에서 본 내부전경.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는 일반적으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누구나 깨닫기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말이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 어떤 상태에 있을 때 깨달았다고 하는 것인가. 내가 깨달았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또 표현할 수 있을까.

먼저, 깨달음이란 '아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그것이 단순한 느낌이라면 결코 보편성과 타당성을 띠지 못한다. 여성이 겪는 출산의 고통을 남성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붓다는 깨달음을 아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고도로 정밀한 지적 체계가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지적인 체계이므로 말로 표현할 수 있고, 그 말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근본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깨달음은 '보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이 아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단순한 지적 관념의 연결에 그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어떤 모습을 전제로 고도의 지적 체계를 세우고 있는 것이므로 단순한 관념의 유희에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표현이고 그 모습은 수행자의 수행의 정도에 따라 밝혀지는 것이므로 의미있는 말이 되는 것이다. 붓다가 말한 법이 가지는 그러한 모습을 법상(法相)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법상을 보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셋째는 깨달음은 타동사로서 무언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깨닫는 것일까? 바로 궁극적 참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참 존재는 불생불멸의 특징이 있다. 결코 무에서 생하고 무로 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참 존재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무언가 정해지지는 않지만 어떤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생불멸의 참 존재를 전통적으로 실상(實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실상에는 수준의 높고 낮음에 따라 몇 개의 구별이 있다. 깨달음의 완성은 여러 실상 중에서도 궁극적 실상을 깨닫는 것이라고 규정하게 되는데, 이러한 궁극적 참 존재들의 체계를 전통적으로 실상문(實相門)이라고 부른다.

# 주(注) - 실상(實相)이란, 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을 떠난 만유(萬有)의 참모습으로 진여(眞如)와 본체(本體)인 동시에 진제(眞諦)인 공 (空)을 말한다. 다시 말해, 잡을 수 없는 찰나의 흐름 속에서 비추어 볼 때, 일체의 상(相)은 오고 감이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중도 (中道)의 지혜이며 열반이다.

우리는 실상을 발견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붓다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러한 불생불멸의 실상이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생하고 멸하거나 나고 죽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것은 생멸하는 세계인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불생불멸의 실상이라는 것은 대단히 모순되어 보인다. 붓다는 우리의 생멸계란 실상에 대한 망집, 착각, 배반을 시작으로 이탈되어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이탈되는 과정을 정확히 깨달았으니, 이처럼 실상으로부터 이탈되는 과정도 깨달음의 내용이 된다. 전통적으로 이 과정을 연기문(緣起門)이라고 부른다.

금수암 뜰에 있는 남천. 전화위복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금수암 뜰에 있는 남천. 전화위복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비로자나불
금수암은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는 사찰이다. 비로자나불은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의 부처를 의미하는 신앙 대상으로서 법신불이라고 한다. 범어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음역하여 비로자나라고 한다.

법신은 빛깔이나 형상이 없는 우주의 본체인 진여실상(眞如實相, 진여의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부처를 신(身)이라고 하였을망정 평범한 색신(色身, 물질적 존재로서 형체가 있는 몸. 육안으로 보이는 몸을 이른다.)이나 생신(生身,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부모에 의탁하여 태어나는 육신.)이 아니며, 갖가지 몸이 이것을 근거로 나오게 되는 원천적인 몸을 뜻한다. 이 부처님을 형상화시킬 때는 천엽연화(千葉蓮華)의 단상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가볍게 들고 있다.

불상의 화대(華臺) 주위에 피어 있는 1,000개의 꽃잎 하나하나가 100억의 국토를 표현한 것으로, 이 부처님이 있는 세계의 공덕 무량함과 광대 장엄함은 헤아릴 길이 없음을 조형화한다.

또, 큰 연화로 이루어져 있는 이 세계 가운데에는 우주의 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하여 흔히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불교에서 그리는 세계의 모습. 연꽃에서 태어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 있는 세계라는 뜻으로, 그 모습은 교파(敎派)와 종파(宗派)에 따라 다르다.)라고 한다.

이 연화장세계의 교주는 곧 삼천대천세계의 교주이며,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는 비로자나불이 허공과 같이 끝없이 크고 넓어 어느 곳에서나 두루 가득 차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경전 상으로 볼 때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의 교주이다. 석가모니불을 응신(應身,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의 기근(機根)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난 부처.)으로 삼고 있는 비로자나불은 때와 장소 및 사람 등에 따라 가변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낸다. 미혹에 결박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심으로 생각하고 맑은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든지 그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즉, 중생이 진심으로 기도하고 간절히 희구하는 바에 따라 그들의 생각이나 행위 경계에 따라 때를 놓치지 않고 때를 기다리지 않고, 어느 곳, 어느 때나 알맞게 행동하고 설법하며, 여러 가지 상이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로자나불은 항상 여러 가지 몸, 여러 가지 명호, 여러 가지 삶의 방편을 나타내어 잠시도 쉬지 않고 진리를 설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 안에서의 비로자나불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석가모니불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자마자 비로자나불과 일체를 이루게 되며, 그 깨달음의 세계를 비롯한 수많은 보살들에게 비로자나불의 무량한 광명에 의지하여 설법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비로자나불에 의해서 정화되고 장엄되어 있는 세계는 특별한 부처님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를 의미한다는 큰 특징을 갖는다.

이 세계 속에 있는 우리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에게 예배하고 귀의 순종함으로써, 부처님의 지혜 속에서 현실계의 상황을 스스로의 눈에도 비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로자나불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보살행(菩薩行, 보살이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는 원만한 행동)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이는 형체가 없는 비로자나불이 보살들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서 형체 있는 것으로 화현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며, 최고의 깨달음으로 향하는 보살행이, 깨달음 그 자체인 비로자나불에게로 돌아가는 길인 것이다.

비로전(毘盧殿) 또는 화엄전(華嚴殿)이라고 할 때에는 보통 비로자나불만을 봉안하는 것을 상례로 삼고 있다. 법당 안의 비로자나불상은 보통 지권인(智拳印, 금강계 대일여래의 인상(印相). 왼손 집게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쥔다. 오른손은 불계를, 왼손은 중생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깊은 뜻을 나타낸다.)을 하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끔 우리는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말을 부모자식간 또는 친한 친구나 연인들에게서 가끔 듣는다. 이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심으로 생각하고 맑은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든지 만날 수 있는 비로자나불처럼 서로서로 비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통하는 파장은 연결되어 있어 쉽게 소통이 되는 원리인가 보다. 금수암의 이야기를 꼭 써야 한다는 필자의 염원을 알아봐 준 스님의 마음이 참 고마운 날이다. 대담 후 내려오는 뒷길엔, 스님의 혜안이 따뜻한 녹차의 향처럼 길게 여운을 남긴다.

금수암의 육각정
금수암의 육각정
금수암 가는 길에 만난 푸른 밭.
금수암 가는 길에 만난 푸른 밭.

 

저작권자 © 양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