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동 소재 '덕수 이용원' 원장
이발 경력 57년, 봉사활동 44년
처음부터 현재까지 아내도 함께
아들·며느리도 이발 봉사 동참
"봉사는 제 인생이고, 인생일 것"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이발 봉사로 보낸 이덕수 이발사. 그는 1979년 서창동에 '덕수 이용원'을 개업한 이후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산지마을로 첫 봉사활동을 떠났다. 현재까지 아내와 함께 매월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으며 때로는 아들과 며느리도 함께 한다.

이덕수 이발사는 언론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조차 단 한 명에게라도 선한 영향력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 바람이 전해졌는지 5년 전부터 자신을 본받은 부부 이발봉사단이 생겨나 감사함을 느낀다고 한다.

가위 하나 들고 도움이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달려온 세월이 어느덧 44년, 75세의 이덕수 이발사는 5년 후 80세가 되어서도 몸이 따라준다면 이발 봉사에 나서고 싶어 한다. 지금부터 봉사활동이 직업이 된 이덕수 이발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1979년 서창동에 '덕수 이용원'을 개업한 이후 44년간 아내와 함께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는 75세 이발사입니다. 44년 전 개곡마을과 내광마을 등 시내로부터 먼 곳에 거주하는 불편한 이들을 돕기 위해 봉사활동을 다짐하고 현재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산시이용협회장과 경로당 노인회장도 현재 맡고 있으며, 협회장 및 노인회장으로서는 노약자 등 취약계층에 도움을 줄 방안을 마련하고 전하고 있습니다.

▶봉사활동 계기는?
과거 오지마을에 계시는 노인과 아이들은 명절이나 결혼 등의 기념일이 아니면 이발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머리카락이 무성하게 자라 눈과 귀가 덮였었습니다.

봉사 개념도 몰랐던 당시의 저는 그들을 보고 "내가 조금만 더 고생하면 저 아이와 어르신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사람은 더욱 좋아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발소를 개업하면 꼭 봉사 활동을 하겠다고 다짐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2005년부터는 양산시 동부 이용지부설립 이후 이용 기술을 전수하여 후배도 양성해 왔습니다. 저는 많은 후배 및 뜻이 함께하는 이들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사회 일원'이라는 목표를 두고 봉사의 필요성과 장점 등을 홍보해 왔습니다.

▶부인과 44년간 함께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과거 대부분의 이발소는 매월 1·15일을 휴일로 지정하여 일을 하고 싶어도 쉬어야 했습니다. 당시 저는 가난했기에 휴일에도 아내와 어디 놀러 가지 못했습니다. 이때 당시 어느 날씨 좋은 날 저는 아내에게 봉사활동을 가자고 말했고, 아내는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저는 차가 없어서 자전거를 타고 먼 시골로 봉사활동을 떠나야 했고, 아내는 제 옷깃을 잡은 채 뒷좌석에서 함께 했습니다. 이발 봉사에 나가면 시골 사람들은 마음만 받겠다는 말에도 저희에게 채소를 답례로 전해줬던 기억이 여전히 뚜렷합니다. 이것이 저희 봉사활동의 첫 시작이고 현재는 경차를 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을 떠올려 보면 험난한 비포장도로를 지났지만, 봉사활동 가는 길이 너무 아름답고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제 아내는 너무 착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발적인 44년 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자랑 하나만 더하자면 겸손하기도 하여 봉사활동으로 미디어에 노출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웃음)

▶부인 말고 다른 가족도 봉사활동을 함께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저에게는 아들 두 명이 있는데 그 중 둘째와 며느리가 함께 합니다.
가족 봉사는 라면땅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라면땅이 20원 하던 시절에 봉사활동을 하러 가면 제 아들은 함께 따라오곤 했습니다. 당시 저는 먼 길을 따라온 아들에게 라면땅을 사주었고, 아들에게는 유일하게 라면땅을 먹을 기회이다 보니 열심히 저의 뒤를 따랐죠.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혹시 애정을 부족하게 주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제 아들은 되레 저의 봉사활동을 존경하고 존중하더라고요. 그리고 아들에게는 봉사활동을 강요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미래를 위해서 이용사 자격증 취득을 권했고 지인 밑에서 배워 합격까지 했습니다. 오히려 며느리까지 뜻에 동참하여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그 뒤로 네 명이 봉사활동을 함께 했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이·미용이 생업이 아니다 보니 요즘은 함께 봉사활동을 못 하지만, 여유가 생기거나 제가 부탁하면 한걸음에 옵니다.

▶많은 봉사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 하나 들려주세요.
과거 내광면 계곡을 지나 보이는 깊은 산지마을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마을 주민 중 한 명이 부모가 일터에 나가 온종일 혼자 집에 있는 장애 청소년이 있는 것 같다고 저에게 전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선 한걸음에 그 아이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 시절 장애인들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등 배척당하고 사회에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죠.

집을 찾고 방안에 들어서니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완전히 덮인 몸이 불편한 장애 청소년이 혼자 있었습니다. 15세로 보이는 그 아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이발을 해본 적이 없었고, 한평생 머리카락을 일반 가위로 길이만 잘랐습니다. 이발의 개념이 전혀 없었죠.

아이를 목욕시키고 이발하고 난 이후 "이발하니까 인물이 훤하네!"라고 하자 태어나 처음으로 단정한 본인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낯설어하더니 이내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기뻐하는 모습에 저도 신났었고 3개월 동안 봉사단과 함께 방문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집을 방문하니 아이는 없었고 집은 비어 있어서 봉사는 중단됐습니다. 요즘도 잘 사는지 생각나곤 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 동료 또는 제자는?
봉사단원 중 마지막 제자인 강승아, 김효진 씨와 봉사를 함께하는 김미영, 박춘희 씨도 하나같이 훌륭하고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이외에도 모든 제자 및 봉사활동을 해왔던 분들이 여전히 새록새록 기억납니다. 그중에서 한 명이 아닌 한 팀을 꼽고 싶습니다. 바로 이두선(46세)·박진표(50세) 이·미용 부부 봉사단입니다.

이 부부 소개에 앞서 제가 이번 양산신문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 인터뷰를 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 자랑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봉사활동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받은 이들이 대표적으로 이두선·박진표 부부입니다.

▶이덕수 부부에 이은 두 번째 부부 봉사단 흥미롭습니다.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 부부는 저희 가족이 봉사하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이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아내 이두선 씨는 저와 18년 동안 봉사활동을 함께 해온 가장 오래된 동료 중 한 명이고, 남편 박진표 씨는 저에게 이용 기술 전수를 요청하여 제가 면허증 취득에 도움을 줬습니다. 지금은 5년 차 봉사 활동자입니다.

두 명은 평산동 '이선헤어'와 서창동 '남자머리'라는 미용실과 이발소를 각각 운영하면서도 봉사활동도 성실히 병행하는 훌륭한 부부입니다. 미래에도 이 부부를 보고 또 다른 부부 이발봉사단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봉사 욕심이 너무 과했는지 두 가지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먼저 허리가 좋지 않습니다. 보통의 봉사활동 현장에는 높이 조절이 가능한 의자가 없어 평범한 의자가 있습니다. 또 주로 휠체어 타고 계신 분들이 많아 제 허리와 무릎으로 높이를 조절하다 보니 허리에 병이 생겼습니다.

두 번째로 최근 대학병원으로부터 신장 제거 수술을 권유받았습니다. 어르신 중 이발할 때 가만히 계시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혹여 가위로 인한 자상이 생길까 이발에 더욱 집중하여 화장실 가는 걸 잊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해 제 탓으로 봉사활동 중에는 소변이 마려워도 참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겹쳐서 지금에 이른 것 같습니다.

젊었을 적에는 봉사활동 횟수도 많았거니와 하루에 100여 명까지 이발했었지만, 최근에는 몸이 많이 쇠약해진 부분이 있어 매월 화요일 요양시설 '성요셉의 집'에서 이발 봉사를 아내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슬퍼하실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죠(웃음). 하지만 이발업 자체가 몸이 건강한 사람도 비슷하게 병을 앓습니다. 그리고 저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분들을 못 만나는 것이 저는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혹여 이 글을 보시는 어르신들께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앞서 전했듯이 과거에 비해 활동을 줄이는 등 오랫동안 만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요.

▶생업이나 고단함으로 봉사활동을 포기하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맞습니다. 앞서 전한 제 아들과 며느리도 생업으로 봉사활동 횟수가 급격히 줄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이유로 봉사활동을 그만두는 부분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선택을 존중합니다.

본인이 여유가 있어야 남들에게 베풀기 더욱 편하고 받는 이들에게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이 쪼그라들고 무언가에 쫓기면 당사자는 봉사가 힘들 것이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저는 절대 봉사활동을 중단하는 이들의 결정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번이라도 나서는 그들의 선한 마음에 대해 박수쳐 주고 싶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제가 지금 이발 경력은 57년입니다. 3년을 더하면 60년이 되는데 이를 달성 하고 싶습니다. 이게 1차 목표입니다.

2차 목표는 경력 60년이면 제 나이가 78세가 됩니다. 여기서 2년을 더해 80세까지 활동하고 싶습니다. 즉 허리와 신장이 받쳐준다면 5년 동안 더 봉사활동을 할 것이고 그 이후에 또다시 목표를 세울 것입니다. 3년 또는 5년 뒤에도 같은 내용으로 이번처럼 양산신문을 만나면 좋겠네요.

▶마지막으로 이덕수 이용사에게 봉사란?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면 그만두더라도 진작에 그만뒀을 겁니다. 하지만 저에게 봉사는 금전적으로 전해지는 행복 그 이상을 줍니다.

저에게 이발 봉사를 받았던 분들은 단정한 미용 목적도 있지만, 그들에게는 대화하고 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4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생각해 보면 되레 제가 그들의 따뜻한 손길과 온정에 치유받았더라구요. 그래서 봉사는 제 인생이었고, 인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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