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법대로 조사님 가르침대로"

통도사 장경각(藏經閣). 담백한 생애만큼이나 맑은 기품을 지닌 글씨를 썼던 홍경 스님 영축총림 통도사의 ‘藏經閣(장경각)’을 비롯하여 구미 도리사의 ‘東國最初伽藍(동국최초가람)’ ‘太祖山桃李寺(태조산도리사)’, 제천 강천사 편액, 부산 선암사 편액 등을 남겼다.

출가 전에 한학을 깊이 공부하고, 입산 후에는 교학에 뛰어난 실력을 보인 홍경장육(弘經藏六, 1899~1971) 스님은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 1947년 가을, "부처님 법대로 조사님 가르침대로" 살아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봉암사 결사'에 동참한 것도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의 일환이었다. 또한 정화불사 당시인 1955년에는 초대 경남종무원장을 지내며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는 일에 힘을 쏟았다. 10년간 금강산 건봉사 강주로 후학을 양성한 스님은 참선 수행은 물론 어산과 염불에도 능했으며, '당대의 명필'로 명성을 떨쳤다. 평생 소박하고 담백한 생활로 후학들의 귀감이 된 홍경 스님의 수행 일화를 영축총림 통도사에 있는 비문과 '신편 통도사지'를 참조하여 기술해 본다.
 

선교는 물론 어산(魚山, 어산은 범음 범패를 총칭하는 말이자 재를 올리는 현장을 뜻한다. 범패 최고 수준에 도달한 스님을 어장(魚丈)이라 부른다.)에도 능했던 홍경 스님은 평생 소박하고 담백한 삶을 보냈다. 남아 있는 사진도 거의 없다. (사진 조계종 총무원)

■홍경장육 스님의 발자취
법명은 성전(聖典)·장육(藏六), 호는 홍경(弘經)이다. 본관은 경주 김씨이고 속명은 훈경(勳經)이다. 1899년 7월 9일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유교경전을 배웠으며 24세에 강원도 건봉사에서 철우대후(鐵牛大吼) 스님의 법을 이었다. 1925년에 동선(東宣)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1928년에 건봉사 대교과를 졸업했다. 건봉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1934년 충남 정혜사의 만공선사에게 선을 수학하고 이후 여러 선방을 다니면서 화두를 참구했다. 부산 금정선원장을 지내며 납자들을 지도했다.

홍경스님은 금강산 건봉사 강원에서 10년간 강주로 있으면서 후학을 지도했을 만큼 뛰어난 교학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화엄경' 강의에 탁월하여 '화엄좌주(華嚴座主)'로 추앙받았다. 또한 스님은 '금강경오가해'에 대해서도 깊은 식견이 있었다. 전 해인총림 해인사 주지 환경(幻鏡, 1887~1983) 스님이 "학식과 글씨가 나보다 백배는 낫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홍경스님은 어산(魚山)과 염불에 두루 능통했다. 특히 '경기범패'는 홍경 스님 아니면 시연할 수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영축총림 통도사에 주석할 무렵인 1958년부터 다음 해까지 2년간 강원 학인들에게 염불을 가르쳤다.

당대의 명필로 명성을 얻었던 스님의 글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거침없이 내려간 글씨는 보는 이들의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했다. 서예가 운여(雲如) 김광업(金鑛業,1906~1976)이 국전(國展) 심사위원장 시절 "어떻게 홍경 스님 글씨를 심사할 수 있느냐"면서 그 자리에서 '특선'을 주었을 만큼 인정받은 명필이었다. 홍경 스님 작품은 위작(僞作)을 하지 못할 정도로 독특한 세계를 자랑하기도 한다.

#주(注) - 금정산의 유서 깊은 사찰, 금정선원 우거진 백년노송과 기암괴석, 깎아 세운 듯한 절벽 등 산세의 수려함이 마치 작은 금강산과 같다 하여 신라 때부터 소금강이라 불렸던 부산 금정산(金井寺), 소금강이란 이름에서 유래된 이곳에는 잘 자란 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산새를 비롯한 각종 동·식물들이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사찰과 암자, 문화유적들이 적지 않은 곳이다. 그 중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암, 효봉, 경봉, 성철, 석주스님 등 근대 한국 불교계의 큰 거목들이 두루 주석하던 유서깊은 사찰이 바로 선학원 사찰 금정사이다. 이렇게 당대의 큰스님들이 한 절에 모인 예는 무척 드문 일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합천 해인사의 가야총림이 문을 닫고 스님들이 남하하게 되자 그해 겨울 효봉 방장스님은 금정선원, 그리고 그 제자 구산 스님은 진주 응석사에 주석하시면서 이 일대의 선풍이 드날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금정사는 근대 최초의 방생지로 유명한 곳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걸쳐 많은 방생지가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유명무실해지자 2004년 입적한 칠보사 조실 석주스님이 이곳에 절 마당을 파고 방생지를 설립, 그물이나 낚시로 인해 또다시 화를 입는 물고기들을 위한 회향터를 이루었다 하니 방생의 참뜻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1924년 금우(金牛)스님에 의해 초창된 금정사는 고승대덕들이 왕래하며 머문 참선도량으로 푸른 선지를 휘날렸을 뿐 아니라 재가불자들의 참선 수행을 위한 선원을 개설하는 등 정통선원으로 거듭나 있다.

영축총림 통도사에 있는 홍경 스님 비. ‘화엄좌주 홍경당 대선사비’라고 쓰여 있다. 운허 스님이 찬을 하고 무불 스님이 글씨를 썼다. (사진 불교신문)

■봉암사 결사에 동참하다
봉암사 결사는 "부처님 법대로 조사님 가르침대로" 살아보자는 취지에서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이 주도하여 1947년 가을에 시작되었다. 성철,청담을 비롯하여 향곡·성수·법전·자운 스님 등과 함께 홍경 장육 스님도 봉암사 결사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빨치산이 봉암사까지 침범하여 전쟁으로 치닫던 1949년 가을에 성철 스님이 봉암사를 먼저 떠나고, 그 이듬해 1950년 봄에 청담 스님을 비롯한 스님들이 봉암사를 떠나면서 결사는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결사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 중에 조계종의 종정 4명과 총무원장 7명이 배출되었다.

봉암사 결사의 배경으로는 한국불교 수행 전통의 복원, 왜색불교의 배격, 성철 스님의 투철한 수행 정신, 사회적 불교 신앙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수행 전통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는 삼국시대 이래의 안거 제도, 고려·조선시대의 수행 전통, 조선시대 승려의 수행 정신을 그 배경으로 언급하였고, 왜색불교 배격에서는 시대적 요청의 부응이라는 측면에서 서술하였다. 봉암사 결사의 불교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여섯 가지로 서술하였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 세 가지는 첫째 승가 계율 정신의 회복, 둘째 한국불교 수행전통의 복원, 셋째 간화선 중심의 한국불교 정체성 확립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어서 부정적인 측면 세 가지는 첫째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갈라지게 되는 종단 분열의 서막, 둘째 지나친 선 중심으로 인한 교학 경시 풍조, 셋째 한국불교 전통문화의 보존 소홀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스님은 1955년 승단이 교화되면서 경남총무원장에 추대되었고 이어서 통도사에 머물렀다. 1958년부터 2년간 통도사에 머물면서 강원 학인들에게 염불을 가르쳤다. 성품이 맑고 순박하였으며 글씨를 잘 써서 세상 여러 곳에 전하는데 맥문(麥門)·맥문관주인(麥門館主人)이라 낙관을 찍었다. 홍경스님은 글씨를 쓰면서 '麥門館主人(맥문관주인)'이란 낙관을 주로 사용했다. 맥문(麥門)이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 육바라밀을 표현한 것으로, 스님의 수행하는 자세를 들여다볼 수 있다. 법명 장육(藏六)에도 육바라밀이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글씨와 범패에 능했던 스님
통도사의 '장경각(藏經閣)'의 현판은 스님의 글씨이다. 그리고 해서(楷書)로 쓴 [금강경]을 목판에 새겨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하고 있다.

#주(注) - 통도사 장경각은 조선(18세기 이후) 후기에 건립된 전각으로 문화재자료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경각은 전래되어 내려오는 경전과 목판을 봉안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장경각은 통도사에 전해지는 혹은 외부에서 유입된 경판(經板)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현재 박물관으로 이전된 장경각의 목판은 정시한(1625~1707)이 저술한 산중일기에도 등장하는 17세 초반 활동한 대 각수 연희가 발원하여 직접 제작한 목판들로서, 통도사에서 약 10km 떨어진 울산 운흥사(雲興寺)가 조선말기에 폐사될 때 옮겨온 중요한 경판들이 보관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목판(木版)장경을 봉안하였는데, 이들 목판 대장경을 강원(講院)의 교과과정에 들어 있는 중요 경전들로『능엄경』,『기신론현수소(起信論賢首疏)』,『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법수(法數)』,『사집(四集)』 등 15종의 경판이 있다. 따라서 통도사는 사찰의 교육기관인 강원을 통해 교육에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스님은 범패를 잘하여 비구 승단에서 첫손가락으로 꼽았다.

범패(梵唄)는 절에서 재(齋)를 올릴 때 쓰는 음악이다. 한국 불교음악의 총칭으로 일명 범음(梵音)·인도(印度)소리, 또는 어산(魚山)이라고도 한다. 가곡,판소리와 함께 한국 3대 성악으로 불린다. 화청(和請) 등이 있고, 작법(作法) 즉 무용이 곁들여진다.

범패는 주로 다음 다섯 가지 재(齋)에 사용된다. 먼저 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로서 가장 많이 쓰이는 사자(死者)를 위한 재로서, 보통 하루가 걸린다. 범패승(梵唄僧)이 처음 범패를 배울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이 상주권공재부터 배운다. 둘째, 시왕각배재(十王各拜齋)인데 일명 '대례왕공문(大禮王供文)'이라고도 하며, 상주권공재보다 약간 규모가 크다. 셋째,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는 죽어서 왕생극락(往生極樂)하게 해 달라고 생전에 미리 지내는 재이다. 넷째, 수륙재(水陸齋)는 수중고혼(水中孤魂)을 위한 재이다. 마지막으로 영산재(靈山齋)는 가장 규모가 큰, 사자를 위한 재로서, 3주야(三晝夜)가 걸린다.

이타(利他)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수도의 목적은 이타(利他)에 있으니 이타심이 없으면 이는 소승외도(小乘外道)이니 심리적 물질적으로 항상 남에게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자기 수도를 위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남에게 봉사하되 추호의 보수도 이를 받아서는 안된다. 예수도 말씀하지 않았는가. "오른손으로 남에게 물건을 주면서 왼손도 모르게 하라." 그리고 천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행이 중요하다, 실행이 없는 소리는 천번 만번 해도 소용이 없다. 아는 것이 천하를 덮더라도 실천이 없는 사람은 한 털끝의 가치도 없는 쓸데없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오직 실행만 있을 뿐 말은 없어야 한다. 이것은 수도 팔계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이다.

평생을 이타심으로 '부처님 법대로, 조사님 가르침대로' 살았던 홍경장육 스님은 임종을 맞이하여 제자들을 불러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즉시 화장한 후에 유골은 수습하지 말고 재를 산에 뿌리라."고 당부했다. 1971년 8월 16일 청량사에서 입적하니 세상 나이 72세, 승려 나이 50세였다. 1972년에 운허 스님이 비문을 지어 통도사 부도전에 세웠다.
 

강원도 건봉사.
강원도 건봉사.
금정산 금정사.(사진 한국관광공사)
금정산 금정사.(사진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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