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을 지키지 못하면 허공에 집을 짓는 것

통도사 영산전 앞.
통도사 영산전 앞.

계율이 청정해야 '깨달음의 집'을 지을 수 있어 수행정진을 하는데 힘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 문성(汶星) 스님의 행장을 찾아 보았다. 감찰원장을 여러 차례 지내며 종단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던 동고문성(東皐汶星, 1897~1997) 스님, 수행자의 위의를 잃지 않고 정진한 수행자로서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스승이었던 문성 스님은 은사인 서응 스님과 만해 스님의 영향을 받아 친일 승려를 척결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문성 스님의 삶을 '신편 통도사지'를 바탕으로 제자 수진 스님(부산 해인정사 주지, 전 해인사 강주)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한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을 참고하여 정리해 본다.


■스님의 출가와 수행과정
스님의 법명은 문성(汶星), 호는 동고(東皐)이다. 본관은 밀양 박씨이며, 속명은 문성(汶星)이다. 1897년 2월 6일 영천군 북안면 명주동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아버지를 따라 통도사에서 참배했는데 저녁예불 드리는 사부대중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하였다. 스승인 서응동호(瑞應東護, 1876~1950) 스님을 따라 고성 옥천사로 가서 설운(雪耘) 스님에게 속명을 그대로 법명으로 사미계를 받았다. 보통 출가를 하면 사미계를 받으며 스승으로부터 법명을 받는 것이 보통인데 스님은 속명이 그대로 법명이 되었다. 훗날 서응 스님에게 '동고'라는 당호(堂號)를 받았다.

문성 스님은 은사 서응 스님에게 32마지기에 이르는 농토를 물려받았다. "공부하는데 사용하라"고 받은 농토였지만, 문성스님은 그 마저 욕심을 물리쳤다. 해방 후 농지개혁 당시 아무 미련 없이 30마지기에 이르는 농지를 농민들에게 댓가 없이 나눠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은 2마지기는 당신을 시봉한 제자에게 넘겨주었다. 평생 청빈하게 살았던 스님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이다. 또한 스님은 20여 년간 부산 마하사 주지 소임을 보았지만, 당신을 위해 축적한 사유재산이 전혀 없었다. 마하사에서 다른 절로 주석처를 옮길 때 통장 하나 없었다고 한다.

1917년 통도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18년 옥천사에서 안거하면서 선을 수행하고 1919년 진주 호국사에서 호은(虎隱) 율사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1920년 서응 스님을 따라 해인사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을 피해 김천 청암사 수도암으로 갔다.

천수를 누리며 평생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았던 동고문성 스님. 노년에 부산 관음정사에 머물 무렵 파안대소하는 스님. (제공 부산 해인정사 수진스님)
천수를 누리며 평생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았던 동고문성 스님. 노년에 부산 관음정사에 머물 무렵 파안대소하는 스님. (제공 부산 해인정사 수진스님)

■독립운동에 앞장 서다
스님은 1922년 3월 서울에서 친일 승려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을 '조선불교계의 악마' 라 하여 등에 북을 매어 치면서 쫓아낼 때 참여하였다. 이것은 문성스님의 생애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대사건'으로 기록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 전체를 경악시켰던 '친일 승려 강대련의 명고축출(鳴鼓逐出)'이었다.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귀속시키려 했던 강대련을 뜻을 같이한 도반들과 '대망신' 시켰던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본산 주지 회의에 참석하려는 강대련을 체포해 종로 거리를 돌면서 북을 치고 '불교의 악마'라며 각성과 참회를 촉구했다. 당시 문성 스님을 비롯한 젊은 스님들은 강대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본사 소임을 보고, 일본인들과 관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겠지만, 조선불교를 왜국에 넘기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조선불교를 망치려는 '불교의 악마'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스님들은 전원 연행됐으며,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된 문성 스님은 4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동고문성 스님은 스님 신분이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독립투쟁을 하게 된 동기는 만해 스님과의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보게. 차 좀 내오게" 손님이 찾아오자, 만해스님이 문성스님에게 차를 내오도록 했다. 만해스님이 통도사에 머물 때 문성스님이 1년간 시봉을 한 적이 있다. 이때 만해스님은 "자네 손을 거친 작설차 맛이 좋다"면서 차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또한 만해스님은 '六穴包三發(육혈포삼발) 勝於讀千卷(승어독천권)'이라는 내용의 강의로 통도사의 젊은 학인들에게 의기(義氣)를 북돋아 주었다. 문성 스님은 만해 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도 이 같은 인연에서 비롯됐다.

통도사 대웅전과 구룡지. 국화가 활짝 피어 통도사 경내를 환하게 하고 있다.
통도사 대웅전과 구룡지. 국화가 활짝 피어 통도사 경내를 환하게 하고 있다.

■계속되는 기도정진
1925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통도사 강원에 편입하여 졸업한 뒤에 중앙불교전수학교를 졸업했다. 이어서 금강산 마하연·묘향산 보현사·통도사·해인사·대흥사 등 여러 선원을 찾아 정진했다. 1932년 옥천사 선원에서 크게 깨친 바가 있었다. 1933년 김상호 등과 함께 조선불교 동맹을 만들어 교단개혁을 시도했다. 1947년 고성 옥천사 백련암에 선원을 열어 6년 결사에 들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청담·성철·서옹 스님등과 함께 수행했다.

1954년 옥천사 주지를 하고 1955년 청담 스님과 함께 정화불사에 앞장 섰다. 정화 이후 청담 스님이 아홉 차례나 총무원장 취임을 부탁했지만 거절했다. 1961년 부산 마하사 주지를 지내면서 1965년 초대 중앙종회의원이 되었다.

1972년 단일종단 중앙감찰원장으로 종단의 주요 활동을 한 뒤 1974년 모든 종단업무를 내려놓고 부산 마하사 방장실을 은둔실(隱遁室)이라 이름 짓고 두문불출하며 오직 [보현행원품]을 독송하면서 보현행을 실천했다. 하루 한 끼를 드시고 차 한 잔으로 수행 정진하며 문을 닫은 스님을 1978년 조계종 초대 원로위원으로 추대했다.
 

#주(注) -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우리 나라에서는 옛부터 보현보살의행원을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방대한 『화엄경』에서 따로 분리시켜서 이 한 품을 별도 책으로 간행, 유포시켰다.

 

그 내용은 부처의 공덕을 성취하고자 하면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행원을 닦아야 함을 밝힌 것이다. 먼저 보현보살의 10대원이, ①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 ② 부처를 찬탄하는 것, ③ 널리 공양(供養)하는 것, ④ 업장(業障)을 참회하는 것, ⑤ 남이 짓는 공덕을 기뻐하는 것, ⑥ 설법하여 주기를 청하는 것, ⑦ 부처님께 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는 것, ⑧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것, ⑨ 항상 중생을 수순(隨順)하는 것, ⑩ 지은 바 모든 공덕을 회향하는 것임을 밝힌다.

그런 후에 이들 열 가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하나씩 구분하여 밝히고 있다. 즉 예배 · 찬탄 · 공양 · 참회 등 어느 하나를 행할지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행하되허공계(虛空界)주5가 다하고중생계주6가 다하고 중생업(衆生業)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 때까지 행하여야 하며, 그 생각이 끊어짐이 없을 뿐 아니라 몸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10대원의 실천이 지니는 공덕이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음과, 이 10대원을 듣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하여 설하는 사람의 공덕이 어떠한지를 밝힌 뒤, 이 모든 사람들이 마침내 생사에서 벗어나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됨을 밝혔다.

본문에 이어서 보현보살이 본문의 뜻을 요약하여 읊은 게송(偈頌)을 수록하였다. 마지막으로 선재동자를 비롯한 수많은 불제자들이 이를 받들어 행하였음을 밝히고 끝을 맺었다.

이 책은 불교의 신행(信行)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구체적이고도 쉽게 밝히고 있다. 화엄종이 크게 교세를 떨쳤던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이 책의 실천을 중요시하였고, 고려의 균여(均如)는 이 책을 근거로 하여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를 지어 유포하였다. 그리고 선종에서는 이 행원품을 근거로 하여 「예불대참회문(禮佛大懺悔文)」을 만들었으며, 우리나라 선종에서는 보현행원사상이 집결된 이 참회문을 저녁마다 외우면서 108배의 절을 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철 스님이 입적한 1993년 이후 조계종 원로들이 종정을 권유했으나 뒤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아 버렸다. 스님은 승려의 규범인 계율을 장 지켜야 한다며 "율법을 준수하고 계율이 청정해야 깨달음의 집을 지을 수 있다."면서 그것이 "바탕이 되어야 깨달음이 목전(目前)에 있다."고 역설하였다.

문성 스님이 부산에 머물 때 많은 수좌들이 찾아왔다. 공부하겠다고 온 수좌들을 스님은 누구보다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러나 예불에 참여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말았다. "예끼 이사람, 불제자로서 기본이 안됐으니 그만 떠나게." 수행자로서 예불은 기본이라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었다. 예불에 빠지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고 했다.

문성스님은 대중과 발우공양을 하면서 소참법문을 자주 했다. 이때 스님은 "시은을 중요하게 생각하라. 그리고 승려의 규범인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주는 도(道)를 닦는 근원이야. 시은(施恩)이 없으면 도를 닦지 못하니, 출가자들은 시주의 은혜를 무서워 해야 돼. 수행을 해서 도를 구해야 하는데, 그 은혜를 모르면 안 되는 것이야." 계율을 청정하게 지킬 것도 강조했다. "승려는 계율이 우선이야. 계율을 지키지 못하면 허공에 집을 짓는 것과 똑 같아."

계율 청정을 강조하던 동고문성 스님은 1997년 7월 10일 부산 반여동 관음정사에서 입적했다. 세상 나이 101세, 승려 나이 87세였다. 다비하니 사리 68과가 나왔다. 2002년 월운해룡(月雲海龍) 스님이 비문을 지어 통도사 부도전에 비를 세웠다.

통도사 일주문
통도사 일주문
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고려후기, 지정(至正) 연(1341~1367)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인군(寧仁君) 이야선불화(李也先不花)가 자신의 무병장수와 일가 친척들의 평안을 빌기 위해 간행한 한국의불경이다.대한민국 국보제2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고 있었다가, 2021년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고려후기, 지정(至正) 연(1341~1367)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인군(寧仁君) 이야선불화(李也先不花)가 자신의 무병장수와 일가 친척들의 평안을 빌기 위해 간행한 한국의불경이다.대한민국 국보제23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하고 있었다가, 2021년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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