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통도사에서 본 영축산.
통도사에서 본 영축산. 정상에서부터 가을 단풍 속으로 서서히 젖어 들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것을 되짚어 보고 그 역사속에서 불굴의 의지로 헤쳐 나갔던 선조들의 의지와 바른 정신을 배우자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세계의 역사가 그렇듯 흥망성쇠를 반복하게 되는 과정속에서 역사가 주는 의미와 교훈을 잘 새겨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는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통도, 구도의 길"이라는 주제로 통도사 1천 년 역사의 역대 고승의 행장을 살펴 보고 있다. 이제 근대시대의 역사로 내려와 일제강점기 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스님들의 행장이 이어지고 있다.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몸으로 지켜 내고자 하였던 스님들의 행장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다.

이번에 소개하는 스님은 속명이 오택언(吳澤彦)으로 앞에서 몇 번 소개했던 스님들의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본인 또한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쳐 매진했던 스님이다.

만해 한용운이 쓴
만해 한용운이 쓴 "조선 독립의 서" 육필 원고.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섰던 스님
춘고(1897~1970) 스님은 1897년 6월 17일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에서 태어났다. 1916년 통도사 불교전문과를 졸업하고 1918년 4월 서울 중앙학림에 입학했다.

# 주(注) - 중앙학림(中央學林)
1915년부터 1922년까지 서울시 명륜동에 있던 불교계의 고등교육기관이다.
일제강점기 30본사 주지연합사무소에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불교계의 인재 양성을 위해서 설립하였다. 중앙학림(中央學林)은 1906년에 불교계의 근대화를 지향하였던 불교연구회가 불교계의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명진학교(明進學校)로 처음 개교하였다.

중앙학림은 일제강점기 불교계 지식인 양성기관으로써 졸업생들은 불교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정책과 불교계의 상황 변화에 따라 여러 번 교명이 바뀌었지만 운영 주체는 불교계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일제가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학림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에서 운영하였던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으로서 1919년 불교계 3·1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수많은 항일 승려를 배출하였다. 중앙학림의 맥은 현재까지 이어져 이후로도 많은 인재가 양성되고, 불교계의 걸출한 지도자들의 산실이 되었다.
 

중앙학림은 여러 과정을 거쳐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현재의 동국대학교의 전신이다.

스님은 1919년 2월 26일 한용운 스님으로부터 독립선언문 삼천 매를 받아 3월 1일 서울 탑동공원에서 시민에게 배포한 뒤 군중을 모아 만세시위 운동을 하였다.

탑동공원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에 있는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서 탑공원·탑동공원(塔洞公園)·파고다 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 원각사 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 봉화의 불이 붙은 유서 깊은 곳이다. 탑골공원이 우리 민족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정신적 재산인 것은 이곳이 3·1운동의 발상지라는 점이며, 일제강점기에 시민들이 울적하여진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으레 이 공원을 찾았다고 한다.

서울시 종로구 한복판에 자리 잡은 탑동공원(파고다공원)은 3ㆍ1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그 의의가 크다. 춘고 스님은 1919년 2월 26일 한용운 스님으로부터 독립선언문 삼천 매를 받아 3월 1일 서울 탑동공원에서 시민에게 배포한 뒤 군중을 모아 만세시위 운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수천 명의 사람이 이곳에 모여 1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곳의 팔각정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서울시 종로구 한복판에 자리 잡은 탑동공원(파고다공원)은 3ㆍ1운동이 시작된 곳으로 그 의의가 크다. 춘고 스님은 1919년 2월 26일 한용운 스님으로부터 독립선언문 삼천 매를 받아 3월 1일 서울 탑동공원에서 시민에게 배포한 뒤 군중을 모아 만세시위 운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수천 명의 사람이 이곳에 모여 1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곳의 팔각정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3·13 신평 만세 운동 주도을 주도하다
이날 만세운동은 통도사 출신의 춘고(오택언, 1897~1970) 스님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3·1운동에 참여한 후 만해(萬海, 1879~1944) 스님의 밀명을 받고 통도사 스님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던 것이다. 오택언 스님은 당시 통도사 주지 김구하(九河, 1872~1965) 스님의 후원으로 서울 중앙학림에서 유학하고 있었으며, 앞서 통도사에서 주석하며 <불교대전>을 집필하고 강사(講師)로 학인을 지도한 만해스님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3월 5일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스님은 통도사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3월 7일 붙잡혔다. 경성지방법원에서 11월 6일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하지만 통도사 스님들이 주도한 '3·13 신평장터 만세운동'은 독립운동의 불길이 경남 전역으로 퍼지는 촉매제가 되었다. 3월 27일, 4월 1일, 5월 4일까지 양산에서 만세운동이 이어졌고, 3월 31일 합천 해인사와 4월 4일 밀양 표충사에서도 스님들이 주도한 시위가 발생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했다.

한편 춘고 스님은 1920년 4월 28일 출옥한 후 1923년 8월 마산 수해구제회 결성 복구기금 회원으로 참가했고, 10월에는 마산포교당 불교청년회 결성을 주도하고 이재부장(理財部長)이 됐다. 1928년 진주 불교포교당 법사로 진주불교진흥회와 불교청년회 주관 석가탄신 기념 법회에서 법문하고 진주 극빈 계층에게 식량과 의복을 시주했다. 1929년 5월 진주청년동맹 주도 "경북 기근 구제회"에 참여했고 12월에 조선불교 승려대회 개최발기회 의원(경남 진주 포교사)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통도사는 구하스님을 비롯한 대중이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통도사 전경. (사진 불교신문)
일제강점기 통도사는 구하스님을 비롯한 대중이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통도사 전경. (사진 불교신문)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 참여하다
춘고스님이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던 불교청년회와 조선불교 승려대회는 친일파들의 조선불교대회의 계획에 맞불을 놓는 운동의 일환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표자들이 잇따라 유고가 되고 조선총독부의 외압이 거세 시련을 많이 겪게 된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한국국학진흥원 김순석 수석연구원의 논문을 참조하여 정리해 보기로 한다.

일제시대 불교계는 사찰령의 시행으로 자율권을 말살당하고, 총독부의 지배정책에 순응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불교계는 총독부의 지배정책에 순응하려는 부류와 끊임없이 자율권을 확보하고자 노력하면서 나름대로 발전을 지향하고자 하는 세력이 공존하였다. 일제시대 불교계의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한 노력은 1920년대 초반에 전개된 불교청년운동에서 확인되지만 특히 1929년 1월 3일부터 5일까지 각황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잘 드러난다. 예나 지금이나 승려대회는 모든 승려들이 참여하여 토론을 통해서 결론을 도출하는 직접 민주제 방식이다. 이렇게 직접 민주제를 채택할 수 있는 것은 승려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서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승려대회가 개최된 배경으로는 이 무렵 불교계는 통일기관 설립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무르익어가던 시기였다. 1924년에 성립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31본사에서 분담금을 납부하여 만든 기관이었지만 31본사를 통제할 수 있는 중앙기관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전 교단 차원에서 통일된 사업을 추진할 수가 없었다.

1929년에 개최된 승려대회는 이렇듯 분산된 역량을 결집하여 불교계의 염원이었던 통일기관을 성립시키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또 하나의 배경으로는 1925년에 설립된 조선불교단에서 1929년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총독부와 경복궁 근정전 그리고 훈련원 마당에서 조선불교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아 그보다 먼저 승려대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조선불교단은 일본의 친일파 양성책 일환으로 대표적인 친일파들과 일본인 유력자들로 구성되어 1925년에 재단법인으로 발족한 불교 외호단체이다. 승려대회준비위원회는 조선불교단에서 1929년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총독부와 경복궁 근정전 그리고 훈련원 마당에서 조선불교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보다 먼저 대회의 개최를 서두른데 있다.

승려대회 개최 취지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내적으로는 종헌 제정과 중앙교무원헌장 및 승니법규를 제정하여 지금까지 승단에 내규도 없는 상황에서 각 본사마다 분립된 상태에서 교단의 통일적 발전을 기할 수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불타의 진리를 선양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정신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서 교단의 위신과 존재가 날로 타락되어 교도들이 통탄하고 있다. 이러한 때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교육·포교·승단의 기강 등 현안 사안을 쇄신하고, 신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교단을 확립하는데 있다'고 밝혔다.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는 식민지 치하에서 자주적으로 종헌과 입법부 및 집행부를 탄생시킨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이 대회의 의미는 불교계가 식민지 지배에 예속되지 않고 자주적으로 발전을 지향하였다는 점에 있다. 더구나 참여 대상을 전국 31본사에서 선발된 대표자로 함으로써 형식적으로 불교계의 총의를 결집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춘고 스님은 1932년 잡지 삼천리에서 차세대 지도자 총관을 실었는데 불교계 차세대 지도자로 통도사에서는 부홍 스님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1935년 3월 조선불교 중앙 교무원 심사위원이 되었으며 1935년 1월 10일 통도사 평의원 선거에서 최다 득표자로 당선되었다. 1947년 5월 조선불교 총무원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7월 전국 불교도대회에 참가하여 불교혁신과 조선불교 총 본원 설치 등의 활동을 했다. 1953년 1월 18일 통도사 주지가 되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바윗돌처럼 무거운 다짐으로 수행 정진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화두를 잡은 춘고 스님의 행장은 우리들에게 전해 주는 바가 많은 것 같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읽어 본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마음을 잡는다. 아마 스님이 독립운동에 임했던 것도 ‘조국통일을 반드시 이루어 내겠노라’라는 마음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해보며 잠시 명상에 잠긴다.

통도사 1378주년 개산대재 중. 감로당 앞 정경.
통도사 1378주년 개산대재 중. 감로당 앞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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