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형형색색 가을을 이야기하고 있다.
치자 꽃은 달콤했던 옛 모습을 상기시켜준다.
온기 머금은 치자처럼 따스함 스민 삶이고 싶다.

메인사진 - 가을햇살이 스며들어 온기를 머금고 익어가는 치자
가을햇살이 스며들어 온기를 머금고 익어가는 치자

 

가을풍경

가을은 조락(凋落)의 절기로 시간의 흐름이 빠름을 절절히 느낄 수 있는 계절이다. 황금빛 들녘은 추수를 끝내고 어느새 휑한 바람이 불고, 고운 단풍으로 물드는가 싶던 나무도 벌써 나목(裸木)의 모습으로 처연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추수 끝난 들녘
추수 끝난 들녘
잎 꽃 다 떨어뜨리고 나목 된 배롱나무
잎 꽃 다 떨어뜨리고 나목 된 배롱나무
가을아침의 푸른 하늘
가을아침의 푸른 하늘

 

가을은 삶의 단상(斷想)들이 때때로 묻어나는 계절이다. 유독 높은 창공(蒼空)은 스스로의 존재를 물어 근본으로 되돌려 놓기도 하고, 얼마 전까지 누렇게 익어가는 꼬투리에서 속의 알맹이를 내어 놓던 밭에는 다시 갈아엎어져 새 싹을 틔워 올리는 짧은 한 생의 모습에서 생경(生硬)하게 다가오기까지 하는 계절이다.

솔개 한 쌍이 창공에 그려내는 악상
꼬투리에서 빠져나온 서리태
수확하고 난 자리에 새싹을 틔워 올리는 마늘
수확하고 난 자리에 새싹을 틔워 올리는 마늘
꼬투리에서 빠져나온 서리태
솔개 한 쌍이 창공에 그려내는 악상

 

계추(季秋)되니 한로(寒露) 상강(霜降)절기로다.’로 시작하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조선 헌종 때 정학유가 지은 가사)]9월령(月令/음력)에는 벼 타작 마친 뒤에 틈나거든 두드리세라며 추수(秋收)의 이모저모로 한 철을 노래하고 있다.

그 옛날 갖가지 농사가 많던 우리 집에서는 비록 어린 아이의 손이라도 틈 날 때면 이런저런 가을걷이에 불려 다녔기에 일 많던 집의 상황이 못마땅하기도 했었다. 마당에 나락()을 널고 뒤엎어가던 부지런한 할아버지의 모습도, 꾸부정하게 구부리고 앉아 콩대를 두드리며 콩을 털어내던 할머니의 모습도 아련한 모습으로 자리한다. 이렇게 가을은 분주한 삶 속에서 추억들을 소환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더 붉고 단단하게 익어가는 사과
더 붉고 단단하게 익어가는 사과
짙은 향과 색을 뿜어내는 금목서
짙은 향과 색을 뿜어내는 금목서
더 까맣게 여물어가는 서리태
더 까맣게 여물어가는 서리태

 

솔개 한 쌍이 푸른 하늘을 소리 내어 빙빙 돌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전깃줄과 오버랩 되며 빠름-느림-빠름의 악상(樂想)을 만들어내고 있다. 깊은 햇살 스며든 사과는 더 붉고 단단하게 익어간다. 금목서는 더 짙게 색과 향을 뿜어낸다. 꼬투리에서 나온 서리태는 더 까맣게 껍질이 여물어간다. 배추는 초록 잎을 겹겹이 피워 올리며 속살을 채워나간다. 땅을 뚫고 나온 무는 더 하얗고 단단하게 몸집을 불려나간다. 노란 융단을 펼친 듯 국화가 소복이 앉아 가을햇살을 쬐고 있다. 그렇게 형형색색의 자연은 내 곁에서 계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풍경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며 가을의 절정을 연출해내고 있다.

초록 잎을 겹겹이 피워 속살을 채워나가는 배추
초록 잎을 겹겹이 피워 속살을 채워나가는 배추
더 하얗고 단단하게 몸집을 불려가는 무
더 하얗고 단단하게 몸집을 불려가는 무
노란 융단을 펼치고 소복이 앉아있는 국화
노란 융단을 펼치고 소복이 앉아있는 국화

 

 

치자나무의 매력

어린 시절에는 참 별났다. 얼굴과 팔다리 곳곳에는 흉 질 날 없을 정도로 개구쟁이였다. 어느 땐가 별나게 놀다가 복숭아 뼈 부근 발목이 시퍼렇게 멍들어 돌아온 손자에게 할머니는 한 처방을 해 주셨다. 밀가루에 노란 물을 넣어 반죽하고 헝겊에 싸서 발목에 칭칭 감아줬는데, 자고 일어나니 시퍼렇던 멍이 사그라지며 붓기도 빠졌었다. 그 노란 물은 뭐였을까? 뜨거운 물에 치자를 우려낸 물이었다. 자연물을 이용한 할머니의 민간요법이자 손자에 대한 지극정성이었다.

우리 형제가 성인이 되어 객지로 나가 공부할 무렵부터 어머니는 틈을 내어 출타가 잦아지면서 여러 배움의 현장으로 나가셨다. 그 배움 중 하나가 천연염색 이었는데, 어머니는 꽤 재미를 붙이셨는지 황토, 커피, 양파, 치자, , 쪽 등 다양한 재료로 물들인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그 덕분에 나도 천연염색 한 개량한복을 이른 나이에 때때로 입게 되었다.

주황빛으로 익어 말려진 치자
주황빛으로 익어 말려진 치자
천연염색 - 왼쪽 세 번째가 치자염색 (2021년 이명희 작가 작품)
천연염색 - 왼쪽 세 번째가 치자염색 (2021년 이명희 작가 작품)

 

지금은 꽤 보편화되었지만, 내가 20대이던 그때는 젊은 사람이 입고 다니기에는 남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옷차림이었다. 그래서 입기를 머뭇거릴 때도 있었는데 오히려 일본에서 유학생활 하는 동안에는 평상복으로 입을 만큼 과감히 입고 다녔었다. 시선을 즐길 만치 자신감이 있었던 건 아니고, 내 외모에서 풍기는 모호함을 오히려 이방인이라는, 한국 사람이라는 하나의 증표로서 더 입고 다닌 듯하다. 주황빛이 도는 노란색의 치자로 물들인 옷이었다.

2005년 도쿄OZONE에서 - 개인전 때 천연염색 개량한복을 입고 일본인들에게 설명
2005년 도쿄OZONE에서 - 개인전 때 천연염색 개량한복을 입고 일본인들에게 설명
2004년 도쿄에서 - 천연염색 삼베옷을 입고 학교에서 도면작업
2004년 도쿄에서 - 천연염색 삼베옷을 입고 학교에서 도면작업
2005년 도쿄에서 - 쪽염과 숯염을 한 삼베옷을 입고 공원 나들이
2005년 도쿄에서 - 쪽염과 숯염을 한 삼베옷을 입고 공원 나들이

 

이렇듯, 치자에 대한 인상은 약용으로 쓰이며 노란색 물들이는 염료로도 사용되는 열매 정도라 생각했는데, 몇 해 전 어린 치자나무를 사다 심고, 이듬해 초여름에 하얗게 핀 꽃과 달짝지근한 향기에 매료되면서 치자나무의 또 다른 매력을 알 수 있었다. 그 달달한 향은 달콤했던 옛날의 모습을 상기시켜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치자의 아름다움

꼭두서니과에 속하며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진 치자나무는 그 열매를 치자라 한다. ‘()’는 술잔이다. 열매가 술잔을 닮았기 때문에 나무()’를 붙여 치자(梔子)라는 이름이 되었다는데 내 눈에는 길쭉한 주머니를 닮은 듯하다. 다른 이름은 목단(木丹), 산치(山梔), 월도(越桃)로 그 꽃을 불가(佛家)에서는 흔히 담복(薝蔔)으로 부른단다. 꽃말은 한없는 즐거움, 순결, 청결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영명 가데니아(Gardenia)'라는 이름은 18세기의 스코틀랜드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알렉산더 가든(Alexander Garden)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어진 것이라 한다.

술잔을 닮아 이름 붙여진 치자
술잔을 닮아 이름 붙여진 치자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치자 꽃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치자 꽃

 

늘푸른나무로 따뜻한 곳을 좋아하며 키 2~3미터 정도의 작은 치자나무는 잎이 마주나기의 긴 타원형이고, 표면이 반질반질하며 꽃은 암수 따로 초여름에 흰빛으로 피며 여섯 장의 꽃잎을 갖고 있다. 그 향기가 재스민과 비교될 만큼 진하여 영어로는 케이프 재스민(Cape jasmine)이라 한다. 달콤한 향은 향수와 비누, 화장품, 아로마 테라피에도 사용되어진다 한다.

치자 꽃봉오리
치자 꽃봉오리
6월에 개화하기 시작하는 치자 꽃
6월에 개화하기 시작하는 치자 꽃
비에 젖은 치자 꽃
비에 젖은 치자 꽃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바람개비모양 꽃잎을 활짝 펼친 치자 꽃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바람개비모양 꽃잎을 활짝 펼친 치자 꽃

 

열매 치자는 타원형으로 세로 능선이 뚜렷한 모양인데, 9월부터 초록색에서 주황색으로 익어가며 크로신(Crocin)과 크로세틴(Crocetin)이라는 노란 색소를 가지고 있어 천연염료, 식용색소로 음식에 활용할 수도 있다는데 인공의 색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색감이다. 또 이 열매는 열기와 붓기를 가라앉히고 해독하는 작용이 있어 외상에 활용하거나 불면증과 황달의 치료에 쓰이고 지혈 및 이뇨의 효과도 있다 한다. 할머니를 비롯한 옛 어른들은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어떻게 식물의 효능을 알아 민간요법으로 실용화 했을까 궁금해진다.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7월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7월
속에서부터 노랗게 익어가는 치자
속에서부터 노랗게 익어가는 치자

 

조선 세종 때 문신이자 서화가인 강희안(姜希顔/1417~1464)이 쓴 한국사 최초의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꽃 색깔이 하얗고 윤택하며 꽃향기가 맑고 부드럽고,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으며 열매는 노란색으로 물들인다며 치자의 네 가지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한다.

다시 치자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여름엔 싱그러운 초록 잎사귀 위로 하얀 꽃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다가 꽃 진 자리에 주머니 모양의 열매가 달리며 가을 되면서 점점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꽃 진 자리 구멍으로 가을햇살을 빨아들여 속을 더 노랗게 만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듯하다. 햇살도 그 속으로 스며들어 온기를 머금은 치자로 거듭나기 위해 속속들이 비추는 듯하다.

가을햇살 머금고 익어가는 치자
가을햇살 머금고 익어가는 치자
치자 열매의 구멍 속으로 가을햇살이 스며든다.
치자 열매의 구멍 속으로 가을햇살이 스며든다.

 

옷 깃 사이로 찬바람이 스며드는 계절이다. 온기를 머금은 치자처럼, 따스함 스민 삶이고 싶다.

몇 해 묵혀 검붉게 변한 치자
몇 해 묵혀 검붉게 변한 치자

 

전이섭 문화교육연구소소장

로컬크리에이터, 양산시 산림조합 대의원, 양산시 제3기 주민참여예산 부위원장, 양산시 시민통합위원회 문화자치위원, 문화체육관광부 지역문화매력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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