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 선 스님

통도사 대웅전. 개산대재를 맞아 활짝 핀 국화향기가 그윽하다.

국지대찰 통도사에서는 오는 10월 30일까지 사찰 경내에서 '천년의 문화를 함께 나누다'를 주제로 다양한 축제들이 열리고 있다. '2023 통도사 개산대재 및 영축문화축제'로서 문화행사 및 전시, 역사와 문화의 장, 나눔과 참여의 장과 함께 야간 특별행사인 '마음의 불씨를 띄우다' 등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특히 '마음의 불씨를 띄우다'는 세계문화유산과 디지털 기술이 만나 조명을 통해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연출한 '무풍한송로 야간경관'과 삼성반월교를 스크린으로 활용한 '미디어 파사드'가 펼쳐져 오랜 역사의 풍과 첨단기술이 어우러지는 장관은 지난 해에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또한 통도사의 개산(開山)을 기념하고 자장율사 등 역대 스님들의 공덕을 기리는 역사와 문화의 장도 21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다고 한다.

필자가 통도사를 찾았을 때는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문화잔치인 '만발공양 및 문화공연'이 성황리에 열리고 있었다. 통도사를 온존히 보존해온 역대 스님의 덕만큼이나 지역 어르신들의 지난 여정도 통도사의 역사와 함께하기에 이 문화행사가 참으로 소중하게 다가왔다.
 

양산시 하북면 지곡리에 있는 합장바위에서 본 통도사 전경. 사진 왼쪽에 보이는 마른 소나무가 40여년째 그대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사진 박병구)

■ 스님의 불가(佛家) 생활, 독립운동으로 일관되다.

근대 한국사의 흐름에 따라 스님들의 사회참여는 주로 국난 위기시에 이루어져 왔는데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 소개하는 신화수 스님도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를 썼던 분이다. 스님의 행장은 주로 조국 독립을 위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 독립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본다.

스님은 경남 고성군 영오면 서오리에서 태어나 통도사 말사인 고성 옥천사에서 출가했다. 통도사에 있던 스님은 오택언이 서울에서 보낸 독립선언서 4부를 받아 1919년 3월 13일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했다. 서울로 피신해 1919년 4월 김상옥과 함께 동대문교회 영국인 전도사 피어슨(pearson)여사 집에서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집총대장을 맡았다. 1919년 11월 중국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의열단이 만들어질 때 스님은 12월 서울에서 김상옥 등과 함께 총독 및 일본인 고관, 민족 반역자 등을 숙청하기로 했다.

# 주(注) - 의열단(義烈團)

1919년 11월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192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민족주의 급진파를 표방하는 단체로 변모되어 갔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요망에 부응하여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길림성 파호문(把虎門) 밖 중국인 반모(潘某)의 집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숙의한 끝에 그 이튿날인 10일 새벽에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고 한 데서 유래된 단체명만 보아도 이 단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의열단은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지역에 조직된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서 과격하고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의열단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개신교인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지원을 받은 신민회가 1911년 서간도(길림성 통화시 류하현)에서 개교한 독립군양성 기관이다) 출신이 중심이 되었고, 그 명단은 자료에 따라 한결같지 않으나,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奎)가 고문으로서 지도하였고, 단원은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俊) 등 13명이며, 단장에는 김원봉이 선출되었다.

의열단의 지도이념 및 사상을 정립하는 데는 창단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김원봉의 동향 선배이며 고문인 김대지와 황상규의 영향이 컸으며, 뒤에는 신채호(申采浩)가 독립운동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가 1922년 12월에 작성에 착수하여 1923년 1월에 완성,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 선언)에는 의열단의 독립투쟁노선과 행동강령이 잘 나타나 있다.

# 주(注) -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시절 좌익계열의 민족주의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국민을 학살한 북한의 정치인이다. 독립운동가로서는 3.1 운동 이후인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박재혁,최수봉,김익상,김상옥,김지섭,나석주 등 많은 단원들의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통치기관 파괴 활동을 이끌었고,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진영 통합 운동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로 활동하였으며,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이 되어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력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으나 해방 후 북한의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의열단은 수많은 의거를 실행에 옮기는 활발한 독립투쟁을 하는 것 외에도 제3차 폭탄계획·대구부호암살계획·북경밀정암살사건·이종암사건 등 의열단이 계획하고 실행한 의거는 계속되었는데, 의열단의 항일투쟁이 민족 운동사상에 끼친 공헌은 매우 컸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의열단의 독립투쟁은 민중 직접 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당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노선이었던 문화주의·외교론·준비론 등과 같은 온건적인 타협주의의 일체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통하여 독립의 쟁취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상하이 망명 시절의 김상옥, 1923년 투탄 사건이 발생할 당시의 종로경찰서, 종로경찰서 폭탄 폭발 현장 사진이 실린 ‘동아일보’ 1923년 1월 14일자.

■ 대동단의 육혈포 사건으로 체포되다

1920년 중국 길림에 근거지를 둔 대동단은 제암리 학살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의원단이 경성에 도착하는 8월 24일 일본 총독과 친일파를 암살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김상옥의 비밀벽장에 암살된 취지문과 암살단 명부 권총 케이스 등이 발견되어 거사 전날 동지들이 검거됐다. 스님은 대동단의 육혈포 암살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 주(注) - 독립대동단(獨立大同團)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흔히 대동단으로 알려진 이 조직은 1919년 3월 말경에 서울 전협(全協)의 집에 모여, 첫째 한국을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이탈하게 해 독립국을 형성하게 할 것, 둘째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할 것, 셋째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 등의 3대 강령을 제창하고, '조선민족대동단'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단원은 귀족·관리·유학자·종교인·상공인·청년·학생·부녀자 등 각계각층 11개 사회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조직되었다.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군자금 등 재정은 전협이, 선전활동 및 대외활동은 최익환(崔益煥)이 맡았다. 그 밖에 김찬규(金燦奎)·박영효(朴泳孝)·민영달(閔泳達) 등이 참가하였다.

그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가진과 나창헌(羅昌憲) 등이 대동단의 활동을 계승해 정남용(鄭南容)이 붙잡히기 전까지 각종 선언서·기관방략(機關方略)·포고문 등을 등사해 전국에 배포하면서 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선전, 유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이종욱(李鍾郁) 등을 파견해 대동단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12월에 독립대동단 규칙서에는 모두 8장 45개 조에 달하는 규칙과 세칙 44개 조가 첨가되어 대기관의 조직 구성을 볼 수 있다.

단원 중 의병장 임병찬(林炳瓚)의 큰아들 응철(應喆), 넷째아들 수명(守明), 동생 병대(炳大) 등 일가가 대를 물려 조국의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주동자 전협 등은 한때 일진회원으로 친일파였으나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어 더욱 그 의미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화수 스님은 조선군정서에 가맹해 조선 내에서 조선독립군 자금을 모집하고 권총과 실탄을 휴대하고 경성에 잠입하여 암살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경고문을 작성 반포하고 총독부 정무총감 암살을 계획하는 등 치안을 방해한 혐의로 1921년 11월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3년 3월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으로 또 기소 되었다가 8월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 주(注) -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은 1923년 1월 12일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다. 김상옥은 폭탄과 권총을 지닌 채 잠입하여 밤 8시 10분경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서쪽 경무계 사무실에서 터졌지만, 퇴근 시간 후에 벌어진 일이라 경찰 측 인명피해는 없었다.

스님은 김상옥과 함께 오래전부터 함께 시국을 토론하던 전우진, 정설교, 윤익중, 이혜수 등 동지들을 규합해 '혁신단'을 조직하고, 비밀리에 등사판과 종이를 사들여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을 간행하였다. 또한 김상옥을 비롯한 전우진, 이혜수, 정설교, 윤익중 등 암살단 핵심 단원들이 조선 총독인 사이토 암살 거사에 동참하기로 모의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스님은 이후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의열단원으로 활동했으리라 생각된다. 1946년 8월 3일 여운흥 등과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당무 국장을 맡았다. 1947년 사회민주당 훈교국장을 지냈으며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개신교인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지원을 받은 신민회가 1911년 서간도(길림성 통화시 류하현)에서 개교한 독립군 양성 기관으로, 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의 전신이다.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광복군 등에 참여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며 민족 해방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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