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나라'와 '부처', 두 축으로 점철되었던 스님

운허용하 스님. 청년기에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히 맞선 항일투사, 종교인으로서는 불경의 번역가, 교육자로서는 후학의 양성에 전념한 분이셨다. (자료 봉선사)

요즘 우리는 물질만능주의,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적 불균형, 소득과 소비의 양극화, 특히 정치권에서의 부정부패, 부조리, 편법 등으로 오로지 정치인 자신의 일신 영달을 도모하는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분노를 느끼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상처가 큰 만큼 우리들은 마음 치유가 더욱 필요해지고, 마침내 힐링 문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절실히 요구되기도 한다. 힐링은 상처 난 마음을 회복시키고 정신적 병리 현상을 치유하는 새로운 마음 치유의 한 방법이다. 이러한 문제를 치유함에는 기본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시킴과 동시에 종교적인 힘에 의한 실천으로 나타날 때 피폐한 사회가 변화되기도 한다. 국가와 시민단체 등의 대 국민적 계몽운동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종교가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는 이유이다.

보통 불가에서의 스님은 모든 속세의 인연을 끊고 산속에 들어가 자신의 깨달음과 중생의 구제를 위해 매진한다고 볼 수 있다. 속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스님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번에 소개하는 운허용하(耘虛龍夏, 1892~1980) 스님은 시대에 처한 국가의 상황에 따라 종교적 이념과 신념을 사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분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광복후에는 미래를 위한 육영사업에 매진했던 스님으로 21세기 혼란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일러주는 가르침의 '울림'이 큰 스님으로 표현한다고 해고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 같다.

■운허용하(耘虛龍夏) 대사의 주요 발자취
운허용하 스님은 해방 이후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한 학승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법명은 용하(龍夏) 호는 운허(耘虛) 불천(佛泉)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며 속명은 학수(學洙)이다. 1892년 2월 25일 평북 정주군 신안면 안흥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리에서 한학과 현대학문을 수학하다 평양 대성중학교를 다녔다. 1912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동창(東昌)학교 교사를 하면서 항일단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에 가입하였다.

# 주(注) - 대동청년당[the Great Eastern Young Men's Corps, 大東靑年黨]

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조직되어 만주까지 확대된 항일 비밀결사 조직이다.

대동청년당은 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계통의 안희제(安熙濟), 서상일(徐相日), 남형우(南亨祐) 등에 의해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단장은 남형우, 부단장은 안희제였고, 안희제는 제2대 단장이 되었다. 이 단체는 이후 만주 지역으로 조직이 확대되었는데 1920년대 중반경까지 활동상이 확인된다. 일제의 집요한 검거 선풍에도 노출되지 않았던 조직이어서 구체적인 조직 시점이나 해체 시점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3·1운동 이전에는 대구·서울·원산·안동·봉천의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기점으로 재만독립운동(在滿獨立運動) 단체를 지원했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은 회사의 상업 거래 형식으로 송달되어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인재 양성에도 주력하여 3·1운동을 계기로 그해 11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의 해외 유학을 추진했다. 또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역할을 수행하였고, 의열단의 국내 연락기관으로도 활동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15년 봉천성에 흥동(興東)학교 1917년 배달(倍達)학교를 세워 교포 아동을 교육했다. 1919년 4월 봉천성 류하현에서 한족신보(漢族新報)란 독립군 기관지를 발간하고 이듬해 홍사단에 가입했으며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1921년 5월 1일 유점사에서 경송(勁松)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겨울에 봉선사로 가서 월초거연(月初巨淵 1858~1934) 스님께 예를 올렸다. 1924년 범어사에서 사교를 이수하고 범어사 개운사 등지에서 교학을 공부하다 1926년 가을 금강산 유점사 반야암에 동국경원(東國經援)을 세우고 경전을 읽다 1927년 유점사로 옮겼다. 1929년에는 서울 개운사에 고등연구원을 설립해 선문염송을 교육했다.

# 주(注) - 선문염송(禪門拈頌)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교책이다. 2009년 1월 28일 대전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선(禪)의 중심 문헌으로, 고려본의 판식을 유지하고 있고 인쇄된 자체의 특징을 보면 자획에 있어서 완결(刓缺)된 부분이 없이 비교적 깨끗하여 판각 후 가까운 시기인 여말선초에 후인 된 것으로 판단된다.

'선문염송집'은 고려 중기에 수선사(修禪寺) 2세 국사(國師)인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 문인(門人) 진훈(眞訓) 등과 더불어 선가(禪家)의 고화(古話) 1,125칙(則)과 이에 관한 여러 선사들의 징·염·화·별·송가·착어·수시·시중·광어·만참 법어를, 불경 또는 조사(祖師)의 어록에서 발췌한 다음 그에 대한 강령의 요지를 제시한 첨(拈)과 송(頌)을 붙여 30권으로 완성한 것이다. 불교사 및 서지학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1929년 다시 상해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1930년 조선혁명당에 가입했다. 다시 귀국하여 1936년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1946년 광동학교(廣東學校)를 설립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1년 안성 청룡사에 피난해서 청룡학숙(靑龍學塾)을 세워 야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동학사 강원(1953) 통도사 강원(1954) 해인사 강원(1955) 통도사 강원(1957)에서 강주를 역임했다. 1959년 통도사 강원을 월운 스님에게 넘겨주고 서울 선학원(1960) 해인사 강원(1961) 선학원(1962)으로 옮겨 학인들을 가르쳤다. 1960년부터 봉선사 복원 불사를 시작했으며 1964년 3월 25일 동국역경원을 설립하여 초대 원장으로 고려대장경 번역을 주도했으며. 독립 유공 표창장을 받았다. 1968년 봉선사가 25교구 본사로 승격하면서 봉선사 주지가 되었고 1971년에는 서울 봉은사 주지가 되면서 역경 장소를 봉은사로 옮겼다. 춘원 이광수의 6촌 동생으로서 이광수가 아들의 죽음과 친일 변절자로 괴로워할 때 불교로 인도해 법화 행자의 길을 가도록 했다. 통도사에서 강주를 역임한 인연으로 1958년 통도사 옥련암기 1967년 통도사 사적비 1972년 홍경대사 비문을 지었다. 1961년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하였다.

 

남양주 봉선사 경내에 있는 운허스님 부도.

■유언 '다경실유촉(茶經室遺囑)'을 남기다
운허 스님은 1980년 11월 18일 봉선사에서 입적하였는데 세속 나이 89세 승려 나이 59세였다. 젊은 시절에는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광복 이후에는 역경 사업과 교육사업으로 일생을 보낸 스님이었다. 스님은 명리와 형식에 초연하였으며, 열반에 들기 9년 전에 유언인 「다경실유촉(茶經室遺囑)」을 남겼는데, 이는 자꾸만 세속화되어 가는 후학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고 있다.

이 유언장에서 스님은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규정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촉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후신(後身)의 일을 아래와 같이 부탁한다.
(1) 문도장으로 봉선사 화장장에 다비하라. (2) 초종범절은 극히 검약하게 하라. (3) 화환, 금만을 사절하라. (4) 습골 시에 사리를 주우려 하지 마라. (5) 대종사라 칭하지 말고 법사라고 쓰라. (6) 사십구제도 간소하게 하라. (7) 소장한 고려대장경, 한글대장경, 화엄경은 봉선사에 납부하라. (8) 마음 속이는 중노릇하지 마라. (9) 문도 간에 화목하고 파벌 짓지 말라. (10) 문집을 간행하지 말라.

서기 1972년 1월 9일
耘虛 囑累
徒弟들에게/ 茶經室遺囑

이렇게 1월에 써 두었던 유촉문을 운허는 그해 초겨울 자신의 사부이신 경송은천 화상의 기제사 날(음, 11월 23일) 문도들에게 보이면서 '강의'했다. 제자 월운은 녹음을 했고, 이것은 다시 《운허선사어문집》에 풀어 옮겨져 세상에 전했다. 위에 인용한 (5) 번의 조항을 운허 스님은 이렇게 '강의'했다. "이전에 노스님 열반하시고 대종사라고 썼는데 지나치지 않나 했습니다. 그러니 그 백 분의 일도 못 되는 내게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해야 되겠는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냥 법사라고만 썼으면 좋겠습니다. 명정에는 '경전 읽고 번역하던 운허당 법사의 관'이라 쓰면 될 것 같습니다. 한문으로 쓸 필요도 없고 이 몇 자가 그 생애를 다 표현한 것이니 그것으로 된 거지요." 이렇게 운허는 살았다.

6·25전쟁 중에 피난처에서 회갑을 맞이하여 〈회갑일 자부(回甲日 自賦)〉 2수를 남기는데, 그의 인생이 '나라'와 '부처', 두 축으로 점철되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 두 번째 수의 앞부분이다.

落魄踽凉萍水客(낙타우량평수객) 빈털터리 처량하게 떠도는 나그네
感君爲設晬解淸(감군위설수해청) 조촐한 환갑상을 차려주니 그대 고맙구려.
效忠初志便成夢(효충초지변성몽) 충성을 다하자던 처음의 뜻, 꿈결로 돌아갔는데
學佛半生空負名(학불반생공부명) 부처를 섬기려던 반평생도 헛이름만 빚졌네.

운허 스님이 열반에 들기 9년 전에 남긴 유언인 「다경실유촉(茶經室遺囑)」.

 

 

스님이 입적하는 날 제자 월운은,
'나라를 위해선 애국인, 후배를 위해선 교육인, 자신을 위해선 수행인, 고금을 통한 지식인, 실로 우러르면 더욱 높고 두드리면 더욱 깊으신 그 인품의 임종은 분명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뿌듯이 안겨 주는 장엄한 낙조와 같았다.' 라고 추모하였다. (불교신문, 1980. 12. 21)

입적(入寂)을 예견하고 법복을 입혀 달라하고 좌정하여 삼매에 든 스승 앞에 월운은 두 무릎을 꿇었다. 운허용하 대사가 생전 좋아하던 《능엄경》을 읽어드리며 증명하시라, 제자는 청했다. '칠처증심' 첫 부분 독경이 마칠 무렵 운허는 88세로 눈을 감았다.

 

1970년대 중반 조계총림 송광사 서울분원(법련사)에서. 앞줄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운허, 구산, 석주, 탄허, 자운, 성수, 관응스님. (사진 하만 불교미술연구소)
6·25 피난길에서 회갑날 쓴 〈자부〉. (자료 불교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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