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에 절인 대추는 정성 깃든 마음의 보양
나무의 한 생에 대한 애달픔과 손길이 깃들어
생의 고통에 인내하며 보다 아름다운 생을 향한 따뜻함이 깃들어

가을하늘 아래 붉게 익어가는 대추는 생을 향한 인내와 따뜻함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깃들어 있어 존재함

길었던 낮이 점차 짧아지며 추분(秋分)이 지나고 나니 물씬 가을느낌이 더하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는 주변의 풍경 속에 나무의 모양과 색깔은 유달리 변화의 모습이 눈에 띈다. 특히 열매가 달리는 나무들은 시각 뿐 아니라 미각을 많이 자극한다.

우렛소리 멈추고 벌레가 숨는다.”는 속담처럼 얼마 전까지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때때로 퍼붓더니 어느새 잠잠해지고 요란하게 한 철을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정성들여 키우다가 죽은 풍뎅이와 사슴벌레를 땅에 묻어주기 위해 아이들은 또 제 나름의 의식을 치루며 자연의 이치를 하나씩 알아나간다.

나는 곧 한가위(仲秋節)라고 하는 대표적 명절인 추석(秋夕)을 앞두고 하나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며칠사이 분주했었다. 문중 벌초를 끝내놓고도 정작 마을에 있는 선대 묘를 벌초 못 하고 있다가 며칠사이 다 끝내고 자손 된 도리를 겨우 했다는 안도감을 갖는다. 조상의 음덕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풀을 베며 그 분들이 살았을 당시의 어려웠던 삶을 떠올리며 내 나름의 정성을 다하고자 애를 쓴다. 그리고 한 생을 누리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 그 분들의 따뜻한 보살핌이 깃들어 있어 내가 존재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묘소 가는 길의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송이가 계절이 무르익어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전에는 가시에 찔려가면서도 알밤을 줍느라 분주했는데 지천에 널린 게 음식인 요즘은 계절을 알려주는 전령사로만 인식하고 사진만 찍으며 가을을 담아본다. 학교 다녀오면 입에 속속 넣으라며 삶은 밤을 일일이 까놓고 손자를 기다리던 할머니의 정성 깃든 마음과 손길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익어가는 밤송이는 가을의 전령사
떨어진 밤송이에는 토실한 밤이 가득

 

밤을 생각하다보니 제사상, 차례상에 올라가는 과실들이 생각난다. 차례상 풍습에 신위(神位)를 기준으로 붉은 음식은 동쪽에 놓고, 흰 음식은 서쪽에 놓는다는 홍동백서(紅東白西)와 함께 생선은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는 어동육서(魚東肉西), 좌측 끝에는 포, 우측 끝에는 식혜를 놓는다는 좌포우혜(左脯右醯)와 함께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과실 대추(), (), (), ()을 떠올려본다. 차례상 음식은 지역과 가정마다 다를 수 있지만, 조율이시(棗栗梨枾)는 필수적으로 올리는 과실 일 것이다.

 

조율이시(棗栗梨枾)

시집 와서 50년을 제사상, 차례상 차리던 어머니는 세월 따라 살아야지. 이제는 차례 지내지 말고 넘어가자하신다. 과일과 떡과 고기를 정성들여 마련하여 상에 올리던 어머니는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정성이 다했기에 그만두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음으로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한 때를 넘어가자는 뜻이겠다 싶다. 앞줄부터 차례차례로 제기 위에 대추와 밤과 배와 감을 올려놓던 어머니도 이제는 대추마냥 붉게 물든 황혼이 되었기 때문이겠다.

붉게 익어 쭈글쭈글해져가는 대추

 

제사상과 명절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대추, , , 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대추는 씨가 하나여서 순수한 혈통과 한 나무에 많은 열매가 달리는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이고, 밤은 땅속에 씨밤이 그대로 있다가 열매가 열리고 썩는다. 이는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으며 조상과의 연결을 상징하는 것이다. 배는 껍질이 누렇고 속살이 하얀 과실인데 황색은 오행에서 우주의 중심을 나타내며 속의 흰색은 순수함과 밝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감은 씨로 나는 과실이 아니라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야 열매가 달리는데, 이는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다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워야 비로소 사람이 됨을 뜻하는 것이라 한다. 상에 올리는 과실 하나에도 자손의 번성과 희망, 위엄을 나타내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중, 대추는 순우리말 같지만 한자어 대조(大棗)가 변한 것으로 대추, 대조 모두 표준어로 인정되고 있다 한다. 남유럽과 서아시아가 원산지로 추정되고 있으나 고려 문종 33(1079), 송나라에서 보내온 백여 가지의 의약품 중에 산조인(酸棗仁)’이라 하여 오늘날의 묏대추가 들어 있다. 재배기록은 고려 명종 18(1188)대추나무 등의 과실나무 심기를 독려했다고려사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한다.

붉은색(적자색)으로 익으면 그냥 먹어도 당도가 높은 대추는 감초와 더불어 한약에서 단맛을 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고, 피를 맑게 하고 신경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한다. 삼계탕 같은 여름철 보양 음식에 인삼과 함께 자주 들어가고, 항산화 성분이 많고 비타민C도 풍부해서 감기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한다.

 

2023년 봄에 심은 대추나무

 

대추나무 새순
대추나무 꽃
대추나무 수피

 

어릴 적, 어머니께서 꿀에 절인 대추를 겨울밤 한 숟가락씩 먹고 자게 했던 이유도 이런 대추의 효능 때문이겠다. 지금은 병원과 약국에서 조제해주는 약으로 몸을 다스리지만 옛적 사람들은 과실을 따고, 말리고, 씨를 빼고 꿀에 절이는 정성으로 몸을 다스렸을 것이다. 꿀에 절인 대추는 몸을 보양하는 약이 아니라 정성이 깃든 마음의 보양일 것이다.

 

붉게 익어가는 대추처럼

대추나무는 주술적 의미에서도 자주 이용되는데,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도장을 만들면 액운을 막아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천벌을 받은 나무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벽사(辟邪/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의 의미로 지닌다는 것은 나무의 불행을 통한 인간의 행운을 바라는 영악한 발상이라 생각되어진다.

열음의 계절 - 여름 대추

 

대추나무가 도장으로 쓰이는 이유 중 하나가 목재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한 데 있다. 나는 익히 이 성질을 알았다. 20년도 더 된 소싯적 작품 중에 대추나무 노래 걸렸네란 작품은 단단한 소재인 골동품 다듬잇돌과 흑단, 대추나무를 이용하여 부드러운 노래를 담는 CD랙으로 변모시킨 것으로 갈라진 대추나무를 흑단 나비촉으로 잇기 위해 끌로 파내면서 그 성질을 경험했었다.

2002년 작품 - CD랙(대추나무 노래 걸렸네)

 

11년 전에는 집을 짓기 위해 담벼락을 확장하면서 담 옆에 있던 할머니께서 심은 멀쩡한 대추나무를 베어내게 되었는데, 아까워서 조명으로 환생시키는 작업을 해서 거실의 전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무를 다듬고 전선을 매립할 홈을 파내면서도 단단한 나무의 성질을 이해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은 색으로 변해가는 나무의 물성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무의 한 생에 대한 애달픔과 손길이 깃들어 다시 살아 이어가는 대추나무의 생이다.

2010년 베어내기 전 담벼락의 건강했던 대추나무
2012년 대추나무 환생작업 1
2012년 대추나무 환생작업 2
2012년 대추나무 환생(거실 조명등) 1
2012년 대추나무 환생(거실 조명등) 2

 

한 때 문화예술교육론으로 대학 강단에 섰을 때, 나는 늘 시 한 편을 감상하고 시작했는데, 당시 소개한 시 중에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을 끄집어내어 본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붉게 둥글어지는 대추를 보며 그 속에 태풍, 천둥, 벼락, 무서리, 땡볕, 초승달이 들어 있음을 표현한 관찰의 힘과 간결한 표현은 어떤 결과가 저절로 되지 않고, 어떤 원인과 과정이 있어야만 한다는 세상의 진리를 쉽게 풀어놓고 있었다. 짧은 시어지만 그 속에는 생의 고통을 인내하며 보다 아름다운 생을 향한 따뜻함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릇, 문화와 예술과 교육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과정의 고통에 대한 인내와 따뜻함이 더 깃들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소개를 했었다. ‘대추 한 알은 그냥 대추 한 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나 한 사람일수도, 세상의 수많은 일 속에 나의 행위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점점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다. 따뜻함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정성이 깃들어야 할 것이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노사연 가수의 바램이란 가사가 흥얼거려진다. 대추가 더 붉게 익어가는 무렵이다.

태풍, 비바람, 땡볕을 이겨내고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대추
태풍, 비바람, 땡볕을 이겨내고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대추
푸름에서 붉음으로 바뀌어가는 가을대추
푸름에서 붉음으로 바뀌어가는 가을대추

 

전이섭 문화교육연구소소장

로컬크리에이터, 양산시 산림조합 대의원, 양산시 제3기 주민참여예산 부위원장, 양산시 시민통합위원회 문화자치위원, 문화체육관광부 지역문화매력 기자단
로컬크리에이터, 양산시 산림조합 대의원, 양산시 제3기 주민참여예산 부위원장, 양산시 시민통합위원회 문화자치위원, 문화체육관광부 지역문화매력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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