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대선사, 천성산을 신금강으로 선포하다

통도사 극락암 전경. 극락암 뒤쪽에 있는 영축산이 병풍처럼 극락암을 감싸고 있다.
통도사 극락암 전경. 극락암 뒤쪽에 있는 영축산이 병풍처럼 극락암을 감싸고 있다.
통도사 극락암 영지와 수련. 극락암 영지는 경봉 스님이 불사를 하였다.
통도사 극락암 영지와 수련. 극락암 영지는 경봉 스님이 불사를 하였다.

얼마 전 조계종 종정이신 성파대종사님을 찾아 뵈었다. 다가오는 11월 11일 제1회 천성산생태숲길전국걷기축제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리고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평소 우리나라 문화 전반은 물론이고 특히 천성산에 관련된 역사·문화 스토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큰 스님의 말씀 중 지금까지도 필자의 마음속에서 그 울림이 멈추질 않고 있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200여 년 전 이양오(李養吾)·남경희(南景羲) 등 조선의 선비들이 천성산의 불지(佛池)를 찾아 여행을 하면서 남긴 기행문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통도사에 주석하셨던 경봉대선사께서 1920년에 북한의 금강산에 견주어 양산의 천성산이 소금강을 넘어 신(新)금강(金剛)이라고 선포를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아울러 이러한 내용에 대해 연구하고 정리해 둔 성범중 명예교수님(울산대학교 인문대학)을 소개해 주셨다. 

성파 큰 스님의 깊고 넓으신 혜량과 성범중 교수님의 소중한 자료 제공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연인지 천년 통도사 대덕 고승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통도, 구도(求道)의 길', 이번 순서가 경봉 스님인데 참으로 신비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산책 중인 경봉 스님.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매월 첫째 일요일이면 극락암에서 1000여명 청중을 상대로 법문을 하였다. 스님 법문의 인기 비결은 내용이 쉽고 유머러스하게 불교 가르침의 핵심을 일러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료 효림출판사)
산책 중인 경봉 스님.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매월 첫째 일요일이면 극락암에서 1000여명 청중을 상대로 법문을 하였다. 스님 법문의 인기 비결은 내용이 쉽고 유머러스하게 불교 가르침의 핵심을 일러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료 효림출판사)

 

■경봉 대선사(1892~1982)의 행장

법명은 정석(靖錫), 호는 경봉(鏡峰), 자호는 원광(圓光)이며, 속명은 김용국(金墉國)이다. 1892년 4월 9일 밀양시 내일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7세에 한문서숙에서 유학을 배웠던 스님은 15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인생무상을 느끼고 1907년 6월 9일 통도사 성해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1908년 통도사 명신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졸업하였으며 1912년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해 한용운 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1914년 졸업했다. 1915년 금강계단에서 서원을 세우고 내원사 혜월(慧月)스님을 찾아 법을 묻고, 해인사 퇴설당 금강산 마하연 석왕사 내원선원 등에서 선을 수행했다. 1917년 마산포교당 포교사로 파견되었으며 1919년 내원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1925년 극락암 양로만일염불회를 창설하고 회장에 추대되어 헌신하면서 참선에 더욱 정진하였다. 1927년 극락선원 화엄산림 법주로서 용맹정진 하던 중 4일째 갑자기 시야가 트이면서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이 나타나는 신이한 경지가 나타났다. 

7일째인 12월 13일 한밤에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닫게 된다. 
 

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目前卽見主人樓(목전즉견주인루)/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優鉢花光法界流(우발화광법계류)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이 없으니 우담발화 꽃 빛이 온 누리에 흐르누나"
 

하고 게송을 읊었다. 

이후 방한암 김재산 백용성 등 당시 선지식에게 널리 물었고 평소 수행은 보조국사 지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30년 2월 25일부터 낙산사 홍련암에서 삼칠일 관음기도를 시작한 지 11일째 꿈속에서 백의관음이 바다를 건너 눈앞에 이르는 가피를 입었다. 

1932년 1월 31일 불교전문강원 원장으로 취임하고 보광선원의 해제법문과 각종 법회에서 법문을 설했다. 1935년 9월 19일 통도사 주지가 되었다. 1937년 삼성반월교를 낙성했다. 1946년 1월 24일 선학원 원장이 되어 수행방법의 전환과 교단혁신을 위해 노력했지만 종단에서 적극 수용하지 않자 1946년 12월 3일 불교혁신총연맹위원장을 맡아 개혁을 주도했다. 1949년 4월 25일 통도사 주지가 되어 총림을 건설하고 포교사업 및 토지 산림을 투명하게 관리하고자 했다. 12월 9일 양산경찰서 사찰계장 김해수가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만든 야산대(野山隊)에 자금지원을 하지 않는다며 스님을 취조실로 불러 고문을 해 신병을 얻었다. 1950년 3월 6일 주지를 사임하고 밀양 무봉사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전쟁 중에도 스님은 수행과 설법에 전념했고 1953년 2월 30일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1953년 11월 3일 통도사 극락호국선원 조실로 추대되었으며 동화사와 내원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겸했다. 1956년 운문사 사리암에 나반존자상을 봉안하고 7일간 기도 축원했으며 사리암이 우리나라 제일의 독성기도도량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 1962년 극락암 영지의 석교를 완공했다. 1973년 매월 첫 번째 일요일에 정기법회를 열어 입적할 때까지 법좌에 올라 설법을 하니 청중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1976년 12월 5일 부산에서 도제 양성을 위해 경봉장학회를 창립하고 남북통일기원대법회를 개최했다. 

스님은 한시와 시조와 붓글씨에도 조예가 깊어 선묵화(禪墨畵)는 매우 깊은 경지를 이루었다.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三笑窟, 경봉 스님이 거처하던 방). 삼소굴 주련에 있는 경봉 스님의 오도송을 풀면,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三笑窟, 경봉 스님이 거처하던 방). 삼소굴 주련에 있는 경봉 스님의 오도송을 풀면,"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없으니 우담발화 꽃 빛이 온 누리에 흐르누나"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目前卽見主人樓(목전즉견주인루)/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優鉢花光法界流(우발화광법계류) 

 

■천성산을 신금강으로 선언하다

양산-울산 가도(街道)의 용연동천(龍淵洞天)으로부터 동으로 1리만 들어가면 명구절경(名區絶境) 원적산(천성산)이 있으니 원적이라 함은 중국말로 원적(圓寂)이고 범어(梵語)로는 열반(涅槃)을 이름이다. 이는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모의(涅槃妙義)를 상주(常住)하며 설법하는 도량(道場)의 의미이다. 지금부터 일천이백칠십오년 전에 세계 위인이라 할 만한 원효조사(元曉祖師)가 신라 계주부(鷄株府)의 매달린 벼랑 곧 기장군 척반암(擲盤庵)에서 선정(禪定)에 들어서 보관(普觀)하니 중국의 대도(大都) 법운사(法雲寺)에 일천 승려가 안거(安倨)하는 중에 한 사람 법려(法侶)의 매우 큰 죄악 때문에 천 사람이 함몰되어 액사(厄死)할 조짐이 있으므로 원효성인(元曉聖人)이 척반구중(擲盤救衆)한 은혜를 천 사람이 느껴 깨닫고 원효조사를 찾아와서 제자가 되었다. 

그 후에 원효선사는 화주(化主)가 되고 모량장자(牟梁長者)는 시주(施主)가 되어 원적산 속에 89암자를 건축하고 천 명 법도(法徒)가 전문적으로 불교를 연구한 결과로 천 사람이 모두 견성득도(見性得道)한 까닭에 그 뒤에 이 산을 천성산(千聖山)이라 불렀다. 

(중략)

고려왕 신우왕(辛偶王) 2년에 서축(西竺) 지공조사(指空祖師)가 이 절에 주석(住錫)하여 가람을 중수(重修)하였으며 현화(玄化)가 크게 떨치고 강송상문(講頌相聞)하여 찬패상수(讚唄相酬)에 육시천악(六時天樂)이 형철(逈徹)하던 곳이니 즉 금강에서 표훈조사(表訓祖師)가 주석하던 표훈사의 동천과 상사하고, 고봉산(高峰山) 꼭대기는 천성산 중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고봉조사(高峯祖師)가 견성(見性)한 곳이며 천태만기(千態萬奇)가 구금강의 비로봉(毘盧峰)과 상사하고, 원효암(元曉庵)의 경개는 구금강의 정양사(正陽寺)와 상사하고, 금봉암(金鳳庵)의 절경은 구금강의 수타암(須陀庵)과 상사하고, 견성암(見性庵)의 경개는 돈도암(頓道庵)과 상사하고, 성불암(成佛庵)의 경개는 구금강의 반야암(般若庵)과 상사하고, 미타암(彌陀庵)의 미타굴(彌陀窟)은 구금강의 보덕굴(普德窟)과 상사하고, 안적암(安寂庵)·조계암(曹溪庵)은 구금강의 불지암(佛地庵)과 만회암(萬灰庵)의 승경과 상사하니 신금강이 여기로다.
 

경봉스님이 천성산을 노래한 시(詩) 한수를 소개한다
 

산천이 일만 가지의 기이한 모습을 만들어 내니

천고의 영웅들이 법의 지팡이를 머물렀네.

폭포가 떨어지는 바위 꼭대기에 백옥이 날고

구름이 걷힌 하늘 끝에 뭇 봉우리가 나타나네.

절이 맑은 기운을 머금으니 마음은 정(定)으로 돌아가고

봄이 매화 향기에 젖으니 학은 소나무에서 잠자네.

묻노니 금강산이 어디인가?

노란 국화는 개울물에 떠가고 달 주변에 종이 울리네.
 

# 주(注) 경봉스님이 천성산을 신금강으로 선포한 내용은 1920년도 축산보림(鷲山寶林) 3호에 실린 글이다. 그 선포내용과 위의 천성산을 노래한 시(詩)는 울산대학교 인문대학에서 명예교수로 재직중인 성범중교수님이 해석한 내용을 인용하였다. 

통도사 극락암 해우소(解憂所).
통도사 극락암 해우소(解憂所).

 

■"버리는 것"이 바로 도(道) 닦는 것이야 

경봉 스님은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매월 첫째 일요일이면 극락암에서 1000여명 청중을 상대로 법문을 하였다. 스님 법문의 인기 비결은 내용이 쉽고 유머러스하게 불교 가르침의 핵심을 일러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날 스님이 산책하다 산길에 앉아 있는데, 한 젊은 스님이 지나다가 물었다. "오는 중[僧]입니까? 가는 중[僧]입니까?" 분명 노스님을 희롱하는 언사였기에 곁에 있던 시자(侍者)가 발끈했다. 그러나 스님은 태연하게 한마디 했다. "나는 쉬고 있는 중이라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유머로 한 방 먹인 경봉(鏡峰) 스님은 화장실에 '해우소(解憂所)'라는 멋진 별명을 붙여준 스님이기도 하다.

"버리는 것이 바로 도(道) 닦는 것" 

화장실에 '해우소(解憂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의 일이다. 당시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 조실로 있던 경봉 스님은 두 개의 나무토막에 붓으로 글자를 써서 시자(侍者)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해우소(解憂所)라고 쓰여 있었고, 다른 나무토막에는 휴급소(休急所)라고 적혀 있었다. 경봉 스님은 두 나무토막을 각각 큰 일을 치르는 곳과 소변을 보는 곳에 걸라고 명했다. 해우소는 근심을 해결하는 곳, 휴급소는 급한 것을 쉬어가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급한 것이 무엇이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는 일이야. 그런데도 중생들은 화급한 일 잊어버리고 바쁘지 않은 것을 바쁘다고 해. 내가 소변보는 곳을 휴급소라고 한 것은 쓸데없이 바쁜 마음 그곳에서 쉬어가라는 뜻이야. 그럼 해우소는 무슨 뜻이냐. 뱃속에 쓸데없는 것이 들어 있으면 속이 답답하고 근심 걱정이 생기지, 그것을 다 버리는 거야. 휴급소에 가서 급한 마음을 쉬어가고, 해우소에서 근심 걱정 버리고 가면. 그것이 바로 도(道) 닦는 거야." 
 

스님은 1982년 7월 17일 병세가 있어 제자들을 불렀다. 시자가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하고 물으니 스님은 웃으면서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하시고 입적하셨다. 세상나이 91세 승려나이 75세였다. 통도사에서 다비를 할 때 폭우가 쏟아져 오랜 가뭄을 해갈하고 허공에 신이한 방광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통도사 서운암 연구실. 중앙 성파대종사님, 오른쪽으로 성범중교수님, 김상걸 전양산시의장님, 왼쪽으로 최석영교수님, 필자이다.
통도사 서운암 연구실. 중앙 성파대종사님, 오른쪽으로 성범중교수님, 김상걸 전양산시의장님, 왼쪽으로 최석영교수님, 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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