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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架山里磨崖如來立像)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지정(등록)일 1972년 2월 12일높이 12m, 폭 2.5m「범어사 북쪽 금정산 정상 부분의 화강암 절벽 위에 새긴 높이 12m의 거대한 불상이다. 가는 선으로 불상을 새겼는데 지금은 오랜 비바람으로 손상이 심하게 된 상태이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 묶음이 둥글게 솟아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네모진 형태이고 활 모양의 가는 눈, 큰 코등이 토속적인 인상을 준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입고 있으나, 가슴 아랫부분은 많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연구가
2021.04.0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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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양산은 일찍부터 참대 산지로 알려졌으며 이와 관련하여 양산 주민들은 참대 제품 수공업을 중요한 생업의 하나로 발전시켜 왔다. 그러므로 양산 주민들은 집집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대로 각종 용구들을 만들어 딴 물건과 교환하였으며 의식, 조세 그리고 공물도 전적으로 참대 수공업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상도 양산군 풍속 -■ 무신집권시대의 출현려 건국 초기는 지방 성주가 주를 이룬 호족들이 나라의 지배 세력이었다. 그들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기록해 놓기 위해 7대 왕조실록을 편찬한다. 그러나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연구가
2021.04.0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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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운 후삼국 시대는 왕건에 의해 통일된다. 고려 태조 왕건은 역사상 찬란하게 빛났던 고구려의 얼을 잊기 위해 국가의 기초를 다져 나갔다. 불교를 국교로 삼아 장려했고 민생안정에 충실하면서도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마침내 고려는 진정한 의미의 민족통일 국가로 기틀을 갖추었다.■ 태조 왕건왕건은 877년 송악에서 해상무역으로 신흥 호족 세력에 들어선 용건과 한 씨 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896년 스무 살에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전장을 누비며 많은 공을 세우게 된다. 903년 전라도 지역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1.03.2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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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이 끊기고 진골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골육상쟁의 다툼이양주의 호족 김인훈은 위기를 맞아 궁예에게 도움을 청한다지원군으로 온 왕건과 인연을 맺어 고려의 문하시중까지 올라신기산성의 성황당은 김인훈을 수호신으로 배향한 사당이었다.우리 역사에서 후삼국 시대는 견훤이 오늘날 전주지역을 기반으로 후백제를 건국한 900년부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까지 40년이 채 되지 않은, 한국사에서 가장 짧은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던 시기로 이때를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전국시대라 표현하기도 한다.즉, 여러 지역의 영웅들이 각자의 세력을 형성하기 위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1.03.17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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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버지 위홍과의 내연 관계로 부정적인 평가 받아위홍 사후 음란행위와 사치로 국정 운영에 관심 멀어져농민반란과 후삼국 세력 확산으로 망국 위기 초래 지탄, 등에 양산서 승하했다는 기록어곡 마을 옛 이름인 어실, 역사적 의미 되새기는 단초 2018년 10월 어느 날, 경주에서 택시 문화 관광 해설하는 지인의 전화가 왔었다. 경주에서 왕릉 박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신라 왕릉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신데, 뜬금없이 양산에 진성여왕릉이 있다고 위치를 좀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1.03.1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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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5년(665) 삽량주로 개편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문무왕 5년(665) 지방의 행정구역을 개편해 상주(경북 상주)와 해주(창녕)를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누어 동쪽지역을 삽량주(歃良州)로 하고 서쪽 지역을 거열주(진주)라 했다.신문왕 때 다시 9주 5소경으로 체제를 정비하였는데 행정상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고 경주를 포함한 그 외 주요 지역을 9주로 나누고 군사적인 기능보다 행정적 기능이 강한 총관(도독)을 파견하여 지방의 균형 발전을 모색하게 된다.한편으로는 반란을 도모할 가능성이 능히 보이는 백제, 고구려인들을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1.03.0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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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 이후 사회혼란 속에마음 둘 곳 없던 백성들은읽고 배우는 교종보다선을 통해 깨우치는 선종에 매료9세기 경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해방 후 양산 용화사에 자리하고양산8경 아래 천태사에는국내 최대 마애불이 미소짓고 있다 삼국통일 전쟁을 거치며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에 의해 불교는 대중에게 자리 잡았으나 교종이었던 불교는 결국 학습을 배제할 수 없었고 다시 글을 익힌 귀족층에 치우치게 되고, 백성들은 불교를 난해한 이론에 지나지 않은 종교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36대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삼국통일의 주역인 무열왕 직계 왕은 끝이 나고 내물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1.02.2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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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이가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어리석은 자가 하는 일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수레의 두 바퀴처럼 행동과 지혜가 갖추어지면새의 두 날개처럼 나에게 이롭고 남도 돕게 된다-원효-처음 불교를 받아들이고자 한 것은 지배층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 한반도 불교는 권력의 가장 위에 왕이 있다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의 전파로 시작했는데, 그 또한 귀족층 사이의 전파에 지나지 않았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왕권이 확립되기 전의 귀족층은 언제나 왕권을 찬탈할 수 있는 위험요인이었다. 불교를 공인하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1.02.1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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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때 뒤늦은 도입에도 가장 융성한 신라 불교중앙집권 고대국가 발전의 기폭제 역할 맡으며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등 신라 대표문화가 됐다통도사 창건 주역 자장율사 이름 딴 매화는 오늘도 핀다몇해 전만 해도 양산이라는 지명을 타 지역에서 말하려 치면 한 번에 알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럴 땐 "통도사가 있는 도시입니다"라고 하면 십중팔구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자체 및 시민들의 노력으로 우리 시가 많이 알려진 듯하다. 일부러 통도사를 말하지 않아도 양산시를 알아주어 기쁘기 그지없다. 그만큼 지역의 위상이 올라간 것이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1.02.0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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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있어 달려가고 싶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발이 달려 스스로 떠난 것도 아닐 텐데 어쩌다 우리 문화유산이 어떤 경로로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곳곳에 흩어지게 되었는지…." -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中에서-사적 제93호인 북정동 고분군 중 10호분인 부부총은 양산의 고분 중 가장 먼저 발굴 조사되었으며 그 기록 또한 비교적 정확히 남아있고 유일하게 재 발굴조사까지 한 고분이다. 양산시립박물관 고분실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적, 문화적으로 학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그러나 안타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1.01.2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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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박 씨 집안의 도움으로왕에 오른 지증왕마립간 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식 왕호를 따른다우산국을 정벌하고 우경법 시행 등 기틀을 닦고불교에 대한 수용성은 아들 법흥왕으로 이어진다그 시기인 5~6세기에 축조된양산의 고분들은가야와 신라의 문화 유산 양론이 존재한다지방 토호세력인지 신라 왕조와 관련된 것인지정밀발굴조사중인 7호분에서 과연 해답이 나올까5세기 삼국은 철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발달한 농기구는 농업생산량 증대를 가져오게 되고 신라는 마립간의 시대를 끝내고 중국식 복호를 받아들여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때가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1.01.2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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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은 가야 문명과 교류했지만가야 영토라는 근거는 희박해철의 왕국이었던 금관가야채굴보다는 가공산업 아니었을까최근들어 가야 재조명 분분하지만일본 역사왜곡 일축 근거 삼아야양산에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는 도시 김해의 고대 역사인 가야는 전하는 내용이 없어 신비의 역사로 불리워지고 있다.기원후 42년 고구려는 3대 대무신왕이 집권해 있었고, 백제는 온조의 장남 다루왕이 즉위해 있었다. 박혁거세의 손자 유리 이사금이 제3대 신라의 왕으로 있던 어느 날, 김해 북쪽 구지봉에서 하늘에서 내려준 여섯 알에서 가야의 건국시조 김수로왕이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1.01.15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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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중 가장 아름다운문화를 꽃피웠던 백제고이왕의 고대국가 기틀 위에근초고왕 4세기 전성기를 열다신라와는 다투지만가야와 왜와는 교류해왜구의 잦은 침략은양산에 방어성을 남겼다기원전 18년에서 기원후 660년까지 삼국시대 한반도 중서부를 31명의 왕이 다스리며 지리적 위치의 강점을 이용해 해상교류를 하며 주변국의 문화를 재빨리 받아들인 나라가 백제다. 이러한 이유에서였던지, 삼국 중 문화적인 면에서 가장 발전이 빨랐으며, 역사기록서인 사서 역시 가장 먼저 편찬한 나라가 백제이기도 하다.백제건국의 주역은 누구?『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1.01.0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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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잘 쏘던 부여인 주몽이졸본성을 도읍으로 세운 나라고구려의 성장은중국에 위협이 되었으니 4세기 전후 위기를 이겨낸소수림왕,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광개토대왕장수왕이 그 뒤를 잇는다 백제에 몰리던 신라 내물왕은고구려에 도움을 청하고급파된 고구려군의 흔적은변방 양산에도 남아 있다삼국시대 중 우리 지역과 가장 관계가 깊은 나라가 신라여서 신라사 위주로 언급하다 보니 어느 덧 4세기에 다달았다.오늘은 고구려의 역사 이야기를 건국에서 광개토대왕까지 준비해 보았다 '크고 높은 성' 고구려의 건국고구려는 한반도 삼국시대 백제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0.12.1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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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가족보다 나라와 임금을 먼저 생각한 충신고구려와 왜의 볼모된 왕자 구하고 자신은 처형돼아들 문량은 거문고의 장인 백결선생으로 이름남아우리 숭모사업은 부진한데 울산은 이미 관광자원화신라사를 통틀어 최고의 충신 박제상은 마립간 시대 내물, 실성, 눌지마립간과 함께 한 인물이다. 박제상은 출생에 관한 기록이 없어 유년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은 신라 박혁거세의 9세손이며 파사왕 이사금의 5세손이라고 하나 이는 연대 차이가 신뢰할 수 없다. 다만 박씨 왕조의 후손으로 판단된다.박제상에 관한 기록은 《삼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0.12.11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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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중의 왕'이란 뜻의 마립간 시대를 연 내물왕김 씨 왕조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황금시대 열어 초기 마립간 시대에 삽량주 간으로 있던 박제상공의 충절을 기려 효충사에 징심헌 재건해 놓고 우리 고장 소주마을 당산나무 아래 비문에는박제상의 아들 백결선생 다녀간 기록 남아있다16대 흘해이사금이 권력다툼에서 패배해 돌아가신 후 양산 어딘가에 안치되었다는 소문을 남긴 채 사로국(계림)의 이사금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어 김 씨가 왕위를 잇게 되고 그가 17대 내물이다. 신라사에서는 내물왕 때 부터 고대국가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러한 이유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0.12.0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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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차차웅의 사위 석탈해4대 이사금에 오른 뒤이사금 시대를 석권하게 되는데12대 첨해이사금 후손이 없어사위인 미추가 이사금에 오르는데그는 어머니가 박씨이다마지막 이사금 흘해는우리 땅 소석 언저리에서 승하해릉이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신라는 왕호를 여럿 바꾸어 칭했다.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 이 중에서 이사금은 나이가 많다(연장자), 또는 이빨(치아)가 많다는 뜻이다. 나이가 어린 사람보다 윗사람이 더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이라는 의미도 내재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신라초 이사금 시기는 어떠했는지 박,석,김 세력 교체 과정 위주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사진탐방가
2020.11.2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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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에서 드물게 세 성씨가 지배했던 신라삼국사기의 왕조 편년은 신라 우월성 과시한 걸까2천년 전 우리 고장은 강 거슬러 온 왜구와 싸우고 가야의 침략에 맞섰던 곳이라가야와 신라 문화 흔적이 함께 남아있는 것이리라왕국에서 고대국가로 가는 길삼국시대의 나라를 말하려 치면 자연스럽게 고구려, 백제, 신라라고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건국연대를 보면 신라가 기원전 57년, 고구려 기원전 37년, 백제 기원전 18년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단순하게 보아도 신라, 고구려,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사진탐방가
2020.11.2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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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한(韓), 한(韓)민족, 한(韓)인, 한(韓)국, 대한(韓)민국 등 우리들은 한(韓)이라는 글자를 마치 우리의 민족성을 대변하듯 사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역사서 중에서 한(韓)이라는 명칭을 최초로 기록한 책은 후한의 왕부(?~162년)가 쓴 「잠부론(潛夫論)」에서 나타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주 선왕 때에 또한 한후(韓候)가 있었는데 그 국(國)은 연(燕)에 가까웠다. 그 후에 한서(韓西)도 성을 한이라 하였는데, 위만(衛滿에) 게 공격당한 바 해중(海中)으로 옮겨가 살았다. 대략 풀이해 보면 한후라는 나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김이분 역사탐방가
2020.11.1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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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의 고조선우리 민족의 시조는 단군왕검이고 한반도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고조선이 이 땅에 존속했던 기간은 B.C. 2,333년 ~ B.C. 108년까지로 무려 2천년이 넘는다. 따라서 한반도 고대국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조선 사회를 자세히 기록한 역사서가 현존하지 않아 여전히 많은 추측과 추론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사의 시대 구분을 해볼 때 고조선 시대야말로 가장 격동적인 한국사 시기라고 말하고 싶다. 이 시기에 한반도는 선사에서 역사시대로 넘어가고 청동기에서
김이분의 양산 역사 이야기
글·사진 역사탐방가 김이분
2020.11.05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