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곡동에 있는 이 무덤은 과연 신라 진성여왕의 능인가

작은 아버지 위홍과의 내연 관계로 부정적인 평가 받아
위홍 사후 음란행위와 사치로 국정 운영에 관심 멀어져
농민반란과 후삼국 세력 확산으로 망국 위기 초래 지탄
<삼국유사>, <동경잡기> 등에 양산서 승하했다는 기록
어곡 마을 옛 이름인 어실, 역사적 의미 되새기는 단초

 


2018년 10월 어느 날, 경주에서 택시 문화 관광 해설하는 지인의 전화가 왔었다. 경주에서 왕릉 박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신라 왕릉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신데, 뜬금없이 양산에 진성여왕릉이 있다고 위치를 좀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만 해도 필자는 지역사보다는 교과 위주의 역사 교육에 주력하고 있었기에 양산 지역사는 알려진 것 외에 그다지 아는 부분이 없었고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는 것조차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었다. 평소 좋아하는 시 관광안내사 이형분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위치를 물어보아 지인에게 전달해 준 적이 있다.

이 일은 필자가 양산의 지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내가 사는 양산 역사의 흔적을 찾아 다른 도시에서 오는데 나름 지역에서 답사하고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물어보는데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이 다녀간 이후 대구와 경주에서 몇 차례에 걸쳐 양산의 진성여왕장지를 찾아보는 답사팀이 다녀갔었다. 오늘은 양산 황산에서 장사를 지낸 진성여왕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 역사서에 부정적 평가
신라 51대 왕으로 신라 역사를 통틀어 3명의 여왕 중 한 명이며 27대 선덕여왕과 28대 진덕여왕은 골품제라는 신라만의 신분제에 의해 왕위를 계승했다는 타당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진성여왕은 서로 왕좌를 차지하겠다고 진골 귀족의 반란이 잦던 통일 신라 말의 유일한 여왕이다.

역사서는 진성여왕에 대해 좋지 못한 평을 늘어놓았다. 일각에서는 유학자의 시선으로 보면 여성이 왕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 했고, 또 다르게는 숙부 위홍과의 관계를 나무라며 부도덕한 성품의 소유자라 하기도 한다. 아무튼 우리는 삼국시대의 정사인 <삼국사기>를 토대로 배웠으니 진성여왕은 음탐하고 젊은 화랑들과 어울려 국정을 멀리함으로써 신라가 망국이 되게 한 왕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삼국사기 이외의 국내외 역사서들을 비교하는 학자들이 많아졌고 진성여왕에 대해서도 새로운 평이 제시되고 있다. 특히 작은 아버지인 위홍과의 불륜 설은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근친상간이 비일비재하였다는 것과 다른 기록에 부부로 명기되어 있는 것 등으로 비추어 단순히 불륜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러한 진성여왕은 신라왕조에서 유래 없는 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첫째 진골 출신의 유일한 여왕, 둘째 신라왕들 중 최초로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난 왕, 셋째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 넷째 20대의 젊은 나이에 여왕이 된 것이다.

진성여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로 잘 알려진 경문왕의 딸이다, 두 명의 아들에 이어 딸까지 왕을 지냈을 만큼 경문왕가의 세력은 탄탄하였다고 할 것이다. 기록에는 키와 외모가 장부과 같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서구적인 체형을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 처용설화가 있는 처용과 비견하는 이도 있다.

■ 천년의 역사가 멸망의 길로
경문왕가가 집권하기 이전 이미 신라는 빈부의 차가 격심해져 백성들은 굶주리기 일쑤였기에 스스로 노비가 되어 목숨을 연명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을 신라노(新羅奴)라고 하는데 신라인 노비라는 뜻으로 당시 당나라에서 신라인들은 인기리에 매매되는 노비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해상왕 장보고 역시 당으로 돈을 벌러 떠나 위해(웨이하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세력가대열에 오른 인물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하루 아침에 좋아지기란 어려울 것이다. 진성여왕 집권기가 되면 백성들의 삶은 최악에 다다라, 세금을 내지 못 하게 되니 국고는 비어갔고 결국 중앙정부에서는 조세독촉을 일삼았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는데 우리역사에서 최초의 농민봉기인 원종·애노의 난등을 비롯해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혼란한 틈을 타 완산주에서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고, 철원성에서 궁예는 태봉(후고구려)을 건국하게 된다. 세력이 점점 약해진 통일신라는 다시 삼국으로 분립되어 후삼국시대가 도래된다. 918년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이 왕이 되는데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국호를 고려로 개칭한다. 926년 발해가 멸망하고 934년 발해 유민과 왕자가 고려에 귀순해오고, 이때까지도 고려와 적대적 관계였던 후백제 견훤은 왕위계승을 놓고 장자 신검을 배제시켜 결국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고 갓갓으로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귀순하고, 같은 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도 더는 백성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며 왕건을 찾아가 나라를 바친다. 이에 왕건은 신라의 수도인 금성에 경주(慶州)라는 새로운 지명을 하사한다. 935년, 이렇게 신라 천년의 역사가 막을 내린다.

■ 양산에서 승하했다는 기록
‘재위 11년 6월 큰오빠(헌강왕)의 서자인 조카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왕좌에서 내려와 지내다, 그해 12월 북궁에서 승하하여, 황산에 장사를 지냈다’ 앞의 내용은 <삼국사기>의 기록이며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성여왕의 성은 김 씨며 이름은 만헌(曼憲)으로 정강왕의 누이동생이다. 왕의 배필은 (위홍)대각간이니 혜성대왕으로 추봉되었다. 887년에 즉위하여 10년간 다스렸다. 897년 소자 효공왕에게 양위하였다. 12월에 돌아가시니 화장하여 모량 서악 또는 미황산에 뼈를 뿌렸다’

위의 두 기록과 이후 조선 시대에 쓰인 <동경잡기(東京雜記)> 권1 능묘 조에서는 당시의 양산군(梁山郡) 황산역(黃山驛)에 진성여왕릉이 있다고 하였고, 그 외 <경주읍지> 권4에는 ‘진성왕릉 재황산 금 양산군 황산역’이라 되어있으며 그 외 <경주김씨준원록>에도 ‘진성왕(김 씨 경문왕녀)……. 재위십년능재 양산군 황산리’라고 되어있다.

1926년 일제강점기 <경주 고적 안내>에도 경산도 황산에 그 능묘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황산이 어디냐가 중요 관건인데 조선 시대 지리지에는 양산이 황산이라는 명확히 제시하고 있으니 진성여왕의 장지를 양산으로 비정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양산 어곡마을 뒤 신불산 공원묘지 인근의 진성여왕릉으로 추정하는 무덤을 찾아보았다. 무덤은 필자가 보기에도 오랜 세월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신라시대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무덤 양식에서 이견을 제시할 법 했다. 지금 진성여왕릉으로 추정하는 무덤은 이 씨 집안 묘로 조선 시대에 세워진 묘이다. 그렇다면 왜 후손이 있는 묘를 진성여왕릉이라고 추론하였을까.

■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능의 진실
1960년~70년대 양산의 역사를 집대성하신 한분의 향토사학자가 계셨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안종석 선생님은 지역의 많은 문화재를 발굴하고 문화재청에 등록하셨던 분으로 지역 역사의 큰 별이었던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균관 부관장까지 역임하실 만큼 명성이 대단하신 분이었다. 1969년 지역 사를 연구하시던 중 진성여왕의 장지와 관련된 기록에서 공통점인 황산을 찾아보기로 하고 평소 어곡이 어실, 능곡, 능뫼, 능걸산 등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오던 신라 여왕이 머물고 여왕의 무덤이 있다는 구전을 증명해보려 했었다. 거기에 당시 지역 어르신 중에는 무덤에 12지신이 새겨진 호석이 둘러져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는 분도 계셔, 중앙지에 기고를 하게 된다.

이후 진성여왕릉의 발견이라는 뉴스 타이틀로 특히 문화계의 집중적 관심을 받자 당시 한국미술사학회 고고학 담당자들이 직접 현장답사를 해보며 지역민들과 인터뷰도 하고 안 종석 선생 댁에 머물며 함께 조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무덤의 양식이 조선 시대 무덤 양식이고 또한 후손이 나타나 신문에 기고된 글을 바로잡아줄 것을 요청한 바, 안선생의 연구는 높이 평하나 문헌적으로 진성여왕릉이라고 비정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며, 당시 지역사학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정 중환 박사께서 <진성여왕릉고(眞聖女王陵考)>를 발표하게 된다. 이렇게 진성여왕은 1970년대 초 잠시 이목을 집중시켰다가 세월 속으로 잊혀 갔다. 그러다 20세기에 와서 신라 사학자 중 왕릉의 위치 비정에 대해 한평생을 바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신 이 근직 교수에 의해 다시 한 번 언급된다.

물론 이 교수 역시 명확한 근거는 없고, 다만 황산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하며 당시 신라의 묘제로는 화장을 해 뿌렸다고 하지만 무덤을 만드는 것이 더 유력하다는 설을 내놓으면서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 왕릉 사를 배우는 제자들의 관심이 다시 황산을 찾아 양산 어곡의 무덤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진성여왕릉 추론지인 이 씨 집안의 묘에 가보면 둘렛돌이 바닥에 깔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볼 수 없는 무덤 양식이며 무덤앞에서 석상이 세워져있다. 지금은 세월의 풍파에 봉분이 깍여 나가 더욱이 릉(陵)으로 보이지 않지만, 70년대 초 봉분의 높이와 둘레가 통일신라 왕릉의 크기와 같은 규모였다는 기록과 사진은 현존해 있다.

■ 어실로라 이름붙인 길
어곡(魚谷)은 과거부터 물고기가 많은 골짜기라는 뜻으로 불렸으며 동네 사람들은 어곡 보다 어실(御室)이라고 부른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유독 어곡(어실)은 왕과 관련된 설화가 많고 왕릉과 관련된 풍수지리도 갖추어진 지역이다.

동서남북을 둘러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 내려앉은 산이 감싸고 있으며 지명에서도 능곡, 능걸산, 능뻔더기등이 있으며 이러한 능과 관련된 지명에는 유독 통일신라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이 함께하고 있다.

현재는 어곡공단 앞을 지나는 길이 어실로라 명명돼 과거의 역사적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지자체의 노력이 보여 좋았다. 그러나 아직도 진성여왕릉에 대해서 제대로 된 위치 비정도 그에 대해 제대로 연구된 것도 없거니와 능제에 따라 황산에 뿌려졌는지, 능이 세워졌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양산의 어곡은 오래전 왕이 머물렀던 집(室)이 있었던 곳이라 하니 기운이 좋은 터 인 것은 확연한 듯 하다.

어실로를 따라 능걸산을 오르는 어실길 등 다양한 스토리가 진성여왕과 함께 우리 양산에서 머물고 있다. 어곡을 들러 진성여왕을 만났다면 진성여왕에게 시무 십조를 올린 최치원선생이 머물렀던 정자 임경대를 돌아보면 통일신라 말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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