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은 우리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동시 ‘고향의 봄’의 작가 이원수 선생이 태어난지 110년이 되는 날이었다. 1912년 양산의 북정동에서 태어난 동원(冬原) 이원수 선생은 양산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창원으로 이사했다. 14살 때 월간지 ‘어린이’에 동시 ‘고향의 봄’을 기고해 정식으로 문단에 올랐다. ‘어린이’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만든 잡지였다. 이원수 선생의 생가가 있는 북정동 인근 길은 양산시가 도로명 주소를 만들 때 ‘고향의봄로’, ‘고향의봄길’로 다시 태어났다.
양산시는 이미 1980년대 중반 당시 이두연 군수 재임 시절 이원수 선생이 양산초등학교에 다녔다는 증언을 확보하고 태어난 곳을 고증하는 등 지역 출신의 문학인으로 선양하는 사업을 벌였다. 춘추공원에 고향의 봄 시비(詩碑)가 세워진 것도 이때였다. 이후 양산시는 생가 주변의 관광지화 사업을 추진하게 되지만 어떤 연유에선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항간에서는 선생의 친일행적이 걸림돌이 되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건 사실이다. 선생은 1942년 이후 ‘지원병을 보내며’ 등 다섯 편의 친일 작품을 써서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 기관지인 ‘반도의 빛’에 발표했다. 이 때문에 그는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올랐다. 일제강점기 16년 동안 부인 최순애 여사와 함께 불모지였던 당시 아동문학계를 일구어 온 결과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과 ‘낮에 나온 반달’의 윤석중 선생과 함께 세 별로 통했던 선생이다. 특히 선생은 여러 편의 비평을 통해 아동문학 이론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경남 함안금융조합에서 근무하던 중 독서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가난으로 일관해 당시 문인들의 유행이던 일본 유학은 꿈고 꾸지 못했고 호구지책으로 다니던 금융조합에서 기관지에 작품을 내라는 압박을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른 친일 작가처럼 적극적으로 동인지나 신문에 발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니던 직장의 기관지에 기고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엄연히 친일 성격의 작품을 발표한 과오는 씻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아동문학의 기초를 닦은 작가 중 한 분인 이원수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그의 고향인 양산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은 참으로 아쉽다. 한때 양산시가 주도해 고향의 봄 관광성역화 사업이 추진되는가 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되었다. 여기에는 ‘고향의 봄’의 배경이 우리 북정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정작 선생 본인이 말년에 창원 소답동이라고 밝힌 것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고장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녔던 연고만 하더라도 향토 인물로 선양하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창원시는 이미 18년 전인 2003년 ‘고향의 봄 도서관을 건립하면서 지하 1층에 이원수 문학관을 동시에 마련했다. 그곳에는 선생의 질곡의 삶과 아내와의 애틋한 사랑의 역사가 전시되고 탁월한 문학적 성취와 함께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알림으로서 관점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부득이하게 세상에 나온 친일적인 시 몇 편에 의해 한 작가의 전 생애의 업적과 공헌이 모조리 폄하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 고장 양산이 낳은 역사적, 문화적 인물이 오히려 고향에서 제대로 선양되지 못하고 있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관설당 박제상이다. 신라 시대 고을 수령으로 고구려에 가서 인질로 잡혀있던 왕족을 구출하고 왜국으로 건너가 왕자를 구해내고는 자신은 죽임을 당했다.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받는 박제상 공의 기념관은 울산에 있고 울주문화원은 매년 박제상문화제를 개최해 이를 기리고 있다. 이에 비하면 상북면 효충사는 초라할 정도다. 조선조 북방을 지키던 장수인 이징옥 장군 삼형제 설화가 담긴 하북면 삼수리 생가도 오랫동안 방치돼 있다가 근래에 와서야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양산은 산업화의 물결로 최근 3~40년 동안 성장을 거듭해 온 신흥 도시다. 단기간에 급성장한 반면 문화적 토대가 미흡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원수 선생의 탄생일을 맞아 지금이라도 선생의 고향으로서의 양산이 그에 합당한 문화 유산 조성에 나섰으면 하는 바램이다. 더구나 이원수 선생의 생가는 문화원과 박물관 바로 인근에 있다. 얼마나 상징적인가. 이원수 선생의 삶과 문학적 업적과 과오까지도 있는 그대로 시민에게 알리며 기리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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