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삼일절이다. 삼일절은 우리 선조들이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만세운동을 펼치셨던 날이다. 곧 선조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오늘의 내가 되살려 실천함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8월 15일을 해방절이라고 하지 않고 광복절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원래 우리의 주권이었던 것을 식민지국가가 되었다가 다시 되찾아 자주독립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 삼일절을 맞아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뭘까? 기미년 삼월 일일에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 민족의 자주 독립을 되찾겠다고 외쳤다면 오늘의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을 되찾고, 우리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인생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말이야? 왜 우리가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지 못한다는 말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 우리들은 내 인생을 내 맘대로 자유롭게 잘 살고 있는가? 아니 질문을 바꿔서 우리들은 모든 일을 내 맘대로 결정하고 실행하면서 늘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법화경에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나온다. 어릴 때 집을 나간 아들이 50년이 지나서 우연히 거부가 되어 살고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들게 되었다. 날품을 팔며 돌아다니던 그 아들은 거부장자가 반기는 것을 보고 자기를 해치려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멀리 도망가려고 한다. 그래서 거부장자가 하인을 시켜서 그를 불러들인 뒤 처음에는 천한 일을 시키다가 차츰 중한 일을 맡긴 뒤, 끝내는 모든 재산을 물려주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본래 모습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거부장자와 같은데 우리가 참모습을 잊어버리고 구걸이나 하는 거지, 곧 복도 지질이도 없는 불쌍한 사람인 줄 착각하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늘 '어떻게 하면 남보다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아파트를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차를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살고 있다. 또한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 중에 나는 그렇지 않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즉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미 물질의 노예생활을 하고 산다는 말이다. 물질에게 자기 주권을 잃어버리고,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자신만의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어느 한 사람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위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어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이, 물질만을 쫓는 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정착되고 있다.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창피스러운 일이 되고, 모두가 속이니까 나도 속여야 현명한 사람으로 되어 버렸다.

현대는 이렇게 맹목적인 소비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경쟁,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구조로 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원불교를 세우신 소태산이 말한 물질의 노예생활에 빠져든 인간들의 파란고해(波瀾苦海 : 폭풍우 심한 파도가 치는 것처럼 밀려오는 고통의 바다)인 것이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쉬운 일 같으나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불경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하늘의 선녀가 바늘을 떨어뜨렸을 때 그 바늘이 사막의 모래 속에 있던 겨자씨에 꽂히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각자가 자신을 생각할 때 70억 인구 중의 겨우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고 산다. 그러나 하나의 인간은 60억분의 1이라는 확률로 태어난 소중한 존재이며, 인간의 세포 속에는 45억년의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삼일절을 맞는 오늘의 우리들은 각자의 개성을 찾고, 물질의 구속에 매이지 않고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자신만의 행복한 삶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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