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 시인의 문화기행] (6) 동궁(東宮)과 월지(月池) 下

동궁과 월지
동궁과 월지

반월성 고갯마루에 걸렸던 서녘해가 소리 없이 지고 나면 월지의 어둠은 불야성의 등불을 밝힌다. 차가운 저녁 바람이 옷깃을 세우고 물결은 둥지 잃은 새들처럼 퍼덕인다. 
 
 十二峰低玉殿荒(십이봉저옥전황) 
 무산 십이 봉은 낮아지고 전각은 황폐한데
 碧池依舊雁聲長(벽지의구안성장) 
 기러기 길게 우는 푸른 못은 옛날과 다름없어라
 寞尋天柱燒香處(막심천주소향처) 
 천주사 분향한 곳 찾지를 마오
 野草痕深內佛堂(마초혼심내불당) 
 들풀에 깊이 묻힌 내불당 자취.
                               <조선말 강위(姜瑋)의 시 >

통일신라의 태평성대와 마지막 비운의 경순왕(敬順王)대까지, 26왕(王) 2백74년간 역대 임금과 동궁들의 환락과 애환이 서린 임해전지(臨海殿址). 월지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선왕 무열왕의 유지를 받들어 왕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건설했다. 역사는 통일신라의 정치적 전성기를 36대 혜공왕까지로 끝내고, 하대(下代)를 37대 선덕왕에서 마지막 56대 경순왕까지 20왕 1백56년간으로 쓰고 있다. 37대 선덕왕 이후부터는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고 지방에서는 '장보고의 난' 등 반란이 일어나 안개속 정국은 말기적 현상을 보인다. 하대(下代) 1백56년 동안 무려 20왕이 교체됐으며 한 왕의 재위 평균연수가 8년에 미치지 못함을 봐도 이 시대의 혼란상을 짐작할 수 있다.

적국의 왕에게 베푼 향연
신라는 일찍이 덕업의 일신(日新)을 국본으로 삼고 국학으로 논어와 효경 등 도(道)의 교과를 교육의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예들은 왕위 쟁탈전과 향락에 도취되어 나라가 망해가는 것도 모르고 불야의 밤을 지새웠으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난을 일삼고 멸망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

특히 51대 진성여왕의 실정은 낙조의 운명에 처한 신라의 최후를 재촉한다. 왕은 품행이 부정하여 미소년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음란한 행동으로 기강을 문란케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관직의 요직까지 거리낌 없이 줌으로써 매관매직 뇌물이 성행하고 상벌은 형평을 잃는다. 조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령(令)은 설자리를 잃었다. 

이렇듯 부패된 조정의 실권으로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천년의 사직 천년의 영화가 막을 내리던 경순왕 5년(931년) 2월, 왕은 고려태조 왕건을 월지 임해전으로 맞아들여 치욕의 향연을 베풀었다. 

왕은 이 자리에서 - "나는 하늘의 돌봄을 받지 못하여 환란이 일어나고 견훤이 불의를 마음대로 해서 이 나라를 침해하니 그 원통함을 어찌하리오" 하며 눈물을 흘렸다. 모든 백성들도 흐느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왕건도 눈물지으며 왕을 위로했다. -《삼국사기》

마의태자의 읍소

마의태자 영정
마의태자 영정

그 후 4년 뒤(935년 10월) 천하대세를 판단한 경순왕은 신라국토를 고려에 귀부할 것을 결심하고 충신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의견을 물었다. 

이 때 태자는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천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며 한탄했다.《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은 눈물을 흘리며 글을 지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했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삼국사기》

태자는 통곡하며 왕에게 이별을 고하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바위를 의지해 집을 짓고 마의초식하다 생을 마친다. 생몰(生歿)연대를 알 수 없는 그가 바로 마의태자(麻衣太子)다. 

태자가 떠날 때 임해전에 있던 모든 백관과 궁녀들이 함께 통곡했다. 지금도 월지에 비가 내리는 밤이면 태자의 애절한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고 한다.

궁중의 호화생활을 짐작케 하는 월지의 유물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의 전성기 문화와 궁중생활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향연과 환락의 무대였다는 임해전은 그 존재여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입증하게 됐으나 애석하게도 그 위치와 규모는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동궁의 정전이었고 월지 서쪽 3동의 건물터중 하나가 임해전이었을 것으로만 추정할 뿐.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궁중생활용품이다. 왕과 군신들이 향연을 즐길 때 못 속에 빠뜨린 것과 신라가 망하고 동궁이 폐허가 된 후 홍수 등 천재로 못 안으로 쓸려 들어간 것들이다. 또 신라가 망하자 고려군이 의도적으로 동궁을 파괴하고 물건들을 못 속에다 쓸어 넣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유물은 그 종류와 수량이 다양하고 방대하다. 그래서 통일신라문화와 당나라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자료들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많은 유물중 목선(木船), 주령구(酒令具), 남근(男根) 등 목제유물과 못으로 물이 유입되는 입수구 유구 등은 당시의 호화로웠던 궁중생활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주령구는 술자리에서의 놀이기구로 당시 풍류의 한 면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사료다. 정방형이 6면, 육각형이 8면으로 14면체의 기하학적 조화를 이루었으며 손에 알맞게 쥘 수 있는 크기다. 당시 신라인들의 뛰어난 수학능력과 해학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물이다. 그러나 이 주령구는 애석하게도 보존처리과정에서 불타버리고 경주박물관 월지관에는 똑 같은 모조품이 전시돼 있다.

술자리 문화를 엿보다
이 주령구는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한 사람씩 던져 그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오늘날의 주사위. 14면에는 각각 이런 벌칙이 새겨져 있다.
 
 * 금성작무(禁聲作舞. 소리 없이 춤추기) 
 * 중인타비(衆人打鼻. 여러 사람 코 때리기) 
 * 음진대소(飮盡大笑. 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 삼잔일거 (三盞一去. 한 번에 술 석 잔 마시기)
 * 유범공과 (有犯空過.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있기) 
 * 자창자음 (自唱自飮. 스스로 노래 부르고 마시기) 
 * 곡비즉진 (曲臂則盡. 팔 굽혀 다 마시기) 
 * 농면공과 (弄面孔過. 얼굴 간지렵혀도 꼼짝 않기) 
 * 임의청가 (任意請歌.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시키기) 
 * 월경일곡 (月鏡一曲. 월경 한 곡조 부르기) 
 * 공영시과 (空詠詩過. 시 한수 읊기) 
 * 양잔즉방 (兩盞則放. 술 두 잔이면 쏟아버리기)
 * 추물막방 (醜物莫放. 더러운 물건을 버리지 않기) 
 * 자창괴래만 (自唱怪來晩. 스스로 괴래만을 부르기) 
 
이때에도 요즘 말하는 소위 무반주 노래나 원샷, 폭탄주 등 다양한 술자리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유물은 목제 남근(男根.13~23㎝)이다. 이 남근상은 모두 4점이 나왔는데 모두 소나무를 다듬어 만들었다. 조각기법이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어 궁중여성들의 성을 위한 자위기구, 또는 여러 형태의 해석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주술적으로 본다면 고대사회로부터 내려 온 남근숭배사상과 샤머니즘의 하나로 수렵이나 어로, 목축, 농경의 풍요와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의미가 내포돼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것들은 청동기시대 반구대 암각화, 신라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 등에서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오묘한 궁중쉼터

동궁과 월지 모형도
동궁과 월지 모형도

월지에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는 반월형의 화강암 수조로 물이 이곳에 고였다가 못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설계돼 있다. 바닥에 큰 판석을 깔아 1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왕을 비롯해 왕자, 궁녀들이 목욕을 즐겼던 장소로 보고 있다.

월지는 그 구조가 어느 한 곳에서도 못 전체를 조망할 수 없도록 설계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못을 한 바퀴 둘러봐야 그 성격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 그 만큼 오묘하게 꾸며진 궁중 쉼터다.

"이것(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言)이 없습니다" 

헌강왕과 지증대사(智證大師)가 달못(月池)가 정자에서 주고 받던 선문답이 오묘한 묵상처럼 떠 오른다.

월지에 꽃이 피고 여름의 녹음이 짙어지고 궁녀들은 나무그늘 곳곳에서 달빛처럼 목욕하며 태평성대를 노래하던 그 날의 봄이 다시 오기를 기원하며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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