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고분 발굴 앞서 시험발굴한 천마총, 경주를 대표금관 쓰고 온갖 금장신구와 부장품을 거느린 주인공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꾼 지증왕, 국호도 신라로 명명금속공예 명장 김인태가 만든 복제품 금관과

천마총 입구

 

(4)천마총(天馬冢) <下>

천년의 역사 속으로 가는 대능원 넓은 뜰에도 겨울이 깊었다. 아직도 안식에 들지 못한 가랑잎들이 바람에 말 갈퀴를 휘날리며 전장을 누비던 신라군처럼 몰려다니고 있었다. 천년동안 잠자던 황금보관을 고스란히 전해 준 천마총, 과연 그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비밀의 단서라도 잡으려는 듯 오늘도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신라의 자궁 속을 드나들고 있다.

천마총은 경주일원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황남동 98호분 발굴조사에 앞서 시험 발굴한 고분이다. 98호분은 표주박형의 쌍분으로 동서의 폭 80미터, 높이 23미터, 기부의 전 길이가 1백20미터나 되는 초대형분. 전형적인 고신라 (古新羅) 적석목관분이다. 말하자면 천마총은 98호분 발굴조사의 대타가 된 셈이다.

당시 사가들은 “경륜이 짧은 우리의 기술로 무턱대고 제일 큰 고분을 발굴한다는 것은 영웅적 발상에 불과하다”며 우려 했다. 또 朴, 昔, 金씨 문중에서는 신라시대에는 이 3성이 왕을 지냈으므로 서로 “우리 문중 조상의 묘임이 분명하다” 며 발굴계획 자체를 반대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발굴작업은 시작됐고 금관과 천마도 등 귀중 유물들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따라서 당초의 계획은 바뀌고 이 무덤이 공개전시장이 된 것이다.

지금도 경주 김 씨들은 천마총에 대해 “김 씨 왕의 무덤이 분명한데 말(馬) 무덤(천마총)이란 이름을 붙여 조상을 욕되게 하고 있다. 언젠가는 분명히 밝혀질 것” 이라며 기대하고 있다.


▶찬란한 금 장신구들 눈부셔
천마총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는 어두웠다. 잠깐의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전시관 앞에 섰다. 땅속에서 치솟는 눈부신 광채.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덤의 주인은 찬란한 금관을 머리에 쓴 채 천년의 잠속에 들어 있었다.

천마총 금관

금제장식의 머리띠와 사슴뿔과 꽃봉오리 금판의 왕관, 나뭇잎 모양의 금드리개 그리고 수많은 부장품들, 어느새 상상의 날개가 돋아 전시관 유리벽을 넘어 천년 역사 속을 날고 있다. 넓은 전시관에는 피장자의 시신이 있던 목관을 비롯해 각종 부장품을 실물크기로 복원해 놓았다. 모두 재현된 모조품.

천마총은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고신라(古新羅)시대 묘제의 형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 되고 있다. 적석목관분의 특징은 평지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시신이 든 목관을 안치하고 목관 주위와 위를 냇돌로 쌓은 형식. 시신은 주로 동침, 단독장이며 풍부한 부장품이 함께 묻혀 있다는 것이 주된 공통점이다.

경주일원에 분포돼 있는 적석목관분은 초기단계를 지나 5~6세기의 전성기를 맞으면서 묘지가 점차 반월성에서 서천쪽 즉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 규모도 대형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초기에 많이 사용했던 가족장인 다곽묘의 형태가 단곽묘로 변하고 있다. 말을 함께 매장하는 순장제도도 사라지고 다만 마구를 부장하는 것으로 형식화 되었다. 그 후 6세기 접어들면서 무덤은 그 형태가 웅장 거대하게 발전된다.


▶무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천마총은 지금까지도 그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다만 출토유물과 묘제형식으로 볼 때 조성된 시기와 당시의 왕이 누구였는가를 추정해 볼 뿐이다. 사가들은 천마총의 은제 요대는 백제 무령왕릉 것과 상통하고, 칠기잔에 그려진 화염문은 고구려 무용총,l 각저총 벽화와 연관지우고 있다.

또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모자의 챙에 그려진 서마(瑞馬)는 강서 우현리 대묘의 것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5세기에 조성된 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쯤에서 천마총의 주인이 누구였는가를 유추해 본다. 부장품의 성격으로 볼 때 왕의 무덤임에는 틀림없다. 천마총을 서기 500년대의 무덤으로 본다면 당시 신라의 왕으로는 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서기 478~500)과 22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서기 500~513) 두 왕이 있다.

삼국사기 소지왕 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신라, 백제, 가야가 연합전선을 구축,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대항했다. 전쟁은 끊이질 않았고 국방을 위해 구벌성(仇伐城), 도나성(刀那城)을 축성했다. 삼년산성 굴산성을 개축했다. 487년에는 서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도로를 보수했다. 490년에는 신라의 서울에 최초로 시장을 열었고 각 지방의 화물을 유통시켰다.

590년 9월에는 소지왕이 날사군(捺巳郡.지금의 영주)에 행차했는데 파로(波路)라는 사람이 그의 딸 벽화(碧花)를 바쳤다. 벽화는 16세의 앳된 소녀로 신라의 당대 미인이었다. 왕은 처음에는 그저 사양하고 말았으나 궁으로 돌아온 후로는 못 견디게 그리워져서 몰래 남루한 옷으로 변장하고 날사군을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의 모습이 고타군 (古陁郡.안동)에 사는 한 노파에게 발각됐다. “만승의 자리에 있는 제왕의 신분으로 신중하지 못하다” 는 질책을 받은 왕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고 벽화를 궁으로 데려와 사랑에 빠졌다.

소지왕은 벽화와의 불타는 사랑으로 몸을 돌보지 않았던 탓인지 그해 11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벽화는 소지왕과 불과 두 달 동안의 짧은 사랑으로 유복자인 왕자를 낳았다. 이때까지 소지왕은 자식이 없었는데 이때 얻은 왕자가 유일한 후사였다.


▶거구에 담력이 대단했던 지증왕
소지왕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지증마립간은 64세에 왕이 됐는데 체격이 웅대하고 담력이 대단했다. ‘왕의 음경이 1자 5치나 돼 마땅한 왕비 감을 구하지 못했다’ 왕은 3도에 사자를 보내 신붓감을 물색토록 했다. 하루는 사자가 모량부(牟梁部)에 이르렀을 때 동노수(冬老樹) 아래서 개 두 마리가 북 만한 똥덩이를 물고 다투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사자는 똥의 임자를 찾아 나섰는데 마침내 그곳에 사는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임을 알게 됐다. 딸의 키가 7자 5치였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 여자를 맞아들여 왕후로 삼았다. <삼국유사>.

동노수라는 말은 이두로 ‘똥노수’로 해석될 수도 있다. 태초에는 온 자연이 화장실이었다. 적당한 곳에 방뇨하는 것은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배설행위였다. 그러나 경주 불국사에는 돌로 만든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데 신라시대부터 좌식 수세식 변기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조선시대 임금님은 화장실에 가지 않고 ‘매화틀’이라고 하는 좌식변기를 사용했는데 임금님의 똥은 ‘매화’라고 불렀다. 화장실의 명칭은 정방(淨房.몸속을 깨끗이 하는 공간), 해우소 (解憂所.생리적인 걱정뿐 아니라 마음의 근심까지 해결하는 공간) 등으로 다양하다.

지증왕 시대에는 국호를 ‘新羅’로 정하고 순장제도를 없앴다. 또 상복법을 만들고 국왕의 칭호를 ‘마립간(麻立干)’에서 王으로 바꾸었으며 시장을 열고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했다. 그렇다면 이 두 왕과 천마총을 연관 지어볼 수 있다. 그러나 천마총이 어느 왕의 릉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지증왕은 체격이 웅대했으므로 발굴된 천마총 목관의 길이가 2미터 15센티 너비80센티인 점으로 보아 장신의 무덤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 요대와 관의 크기가 보통 체격의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장대한 지증왕의 시신을 안치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사가들 사이엔 소지왕 이전부터 왕릉급 무덤의 위치가 반월성에서 점차 서북쪽으로 멀어지고 있는 점을 들어 17대 내물왕 (奈勿王)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금속공예 명장의 필생 업적
현재 천마총에 전시돼 있는 유물은 진품과 똑같이 만든 복제품으로 그 분야 최고의 제작자들에게 의뢰해 재현해 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이 금관이다. 순금제품 왕관을 재현시킨 사람은 금속공예 명장 김인태 (작고)이다. 그는 열서너 살 때부터 찬란한 신라 금관의 신비함에 매료되어 재현의 꿈을 키운 사람이다.

그는 순금으로 신라 금관과 똑같은 기법으로 똑같은 크기의 금관을 만들어 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나 부인의 금반지 하나 장만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순금 금관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바람은 한갓 꿈에 불과했다 그러다 1976년, 천마총을 복원 공개하기로 확정한 문화재 관리국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금관 제작자로 그를 지목, 금관 재현의 꿈을 이루게 된다.

그는 2관(7.5kg)이 넘는 순금으로 금관을 비롯해 금관모, 새날개 모양 금제장식, 금제 나비모양 관식, 금제 허리띠와 거기에 매달린 띠드리개 등을 실물 그대로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경주공방측에서는 완성품들을 서울로 가져가 문화재 전문위원들에게 심사를 받았다. "참으로 정교하게 잘 만들었소.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복제품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니, 앞으로 똑같은 것은 더는 만들지 마시오" 하며 칭송했다. 그는 생전에 “혼을 쏟아 부어 만든 재현품들을 놓아두고 나오는데 그만 눈물이 쏟아지더라” 며 회고 했다고 한다.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 했던가.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 것, 바로 그 작품들이 지금 천마총 전시실에서 숱한 사람들의 마음을 찬란하게 비추고 있다. 오늘도 수많은 방문객을 맞고 있는 천마총, 이 무덤의 주인을 밝히는 문제가 사가들의 숙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천마총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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