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에 대하여

                                                 신재화

목욕탕에 앉아 팔 다리를 씻는다
왼쪽 팔과 어깨를 씻고 난 후
긁어진 팔목과 억세어진 손등
튀어나온 팔뚝을 순서대로 씻는다

오늘은 큰맘 먹고 순서를 바꾸어 보기로 한다.
고생이 많았던 오른쪽 팔을 먼저 씻어 본다
서운함이 많았던 막내딸 같은 그쪽들
부터 씻어주기로 한다

어머니가 번번이 남동생을 씻기고 나서야
그 물 속에 재탕처럼 나를 씻겼다
언젠가 한번은 맑고 깨끗한 물에
먼저 씻고 싶어서
동생을 밀치고 목욕통 앞에 앉은 적이 있었다
불쑥 나타난 할머니는
눈을 잔뜩 흘기고
뒤로 밀린 동생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 장손 이리 오너라
코도 풀어주고 발까락 속까지
말끔하게 씻겨서 나오던 동생을 기다렸던
그 겨울의 순서가 나는 너무 춥고 매웠다
그 후로도 세월은 내게 순서를 강요하였다
너의 순서가 아니라고 하였고
여름이 흘러가야 가을이 오는 이치가
순서가 아닐 때도 있었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순서들도 있었고
억지 춘향의 화상을 하고 나타난 순서 또한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먼저,
고분고분 만만했던 오른 쪽부터
더 많은 짐을 옮겼던 너부터
가장 맑은 물에 씻어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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