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이 만난 사람] 영구귀국 11년째인 사할린 동포 최정무씨 부부

사할린에서는 양력 설을 쇠기 때문에 설 이라고 특별히 음식을 하거나 손님을 맞지는 않는다고 한다.

누가 뭐래도 사할린 동포는 우리나라의 불행한 역사의 희생자들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대동아전쟁을 시작해 한참 위용을 떨치다 미국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린 일본이 마지막 발악을 하던 시기,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강제로 징용된 우리 동포들 중 일부가 머나먼 동토의 땅 사할린에 첫발을 내디뎠다. 탄광과 각종 군수품 공장에서 노역에 기진맥진할 때쯤 일본의 패전 소식이 들려왔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가담으로 마지막 목줄이 끊기게 된 일본이 사할린 섬에서 철수하면서 우리 민족은 내팽겨치고 순수 일본인들만 송환시켰다. 그 와중에 일부 배에 올라탄 조선인들은 일본에 닿지도 못하고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숱한 날들을 한숨으로 지샌 조선인들은 그렇게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무명천지의 고아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해방되기 2년 전 징용 간 아버지

1995년 사할린에서 학교 동창생 모임을 갖고 있는 최정무씨(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최정무(76)씨의 아버지도 해방되기 2년 전 징용으로 사할린 땅을 밟았다. 부산에서 단란하게 살던 아내와 세 자녀까지 추위와 노동의 현장에 데리고 온 부친은 차가운 타국에서 또다시 세 형제를 더 낳았다. 만 한 살에 해방을 맞은 최정무는 그 기쁨도 모른 채 사할린에서 10년제 학교를 다니며 나름 단란한 가족생활을 이어갔다. 24살에 지금의 아내 정남준(당시 22세)씨를 만나 혼인을 하고 두 딸을 낳아 기르면서 세상은 이 곳뿐이려니 하며 살아왔다. 20년 이상 직장에 다니고 퇴직하고도 어려운 살림살이에 여러 가지 사업도 하면서 딸자식 키우는데 평생을 바쳤다. 다행히 두 딸도 부모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착실히 성장해 큰애는 본토로 유학가서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따서 사할린 큰 병원에서 근무하게 됐고, 작은애도 미용사업을 하며 좋은 배필 만나서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모국을 향한 원초적 그리움

2009년 10월 영구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이 상북면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고 있다.

언제부턴가 최정무씨의 가슴 속에는 응어리진 무엇이 있었다. 1999년 경 부모님과 형, 누나들이 2년 터울로 한국에 돌아가 살게 되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동포 영구귀국 주선사업으로,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조선민족에만 해당되는 사업이었다. 사할린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국에 함께 돌아오지 못하고 동토에 눌러 살게 된 최정무씨 가족은 그 때부터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다 한다. 드디어 때가 왔다. 2008년부터 대한적십자사가 주선해 일본적십자사와 러시아 당국간에 원만한 협의를 이끌어 사할린 동포 1세대의 영주귀국사업이 재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제한된 인원 탓인지 바로 선정되지 못했다. 고대하던 귀국은 2009년 10월에야 이루어졌다.

“딸아이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귀국 비행기에 올랐지만 마음은 무거웠지요” 당시 영주귀국 대상이 ‘1세대 + 1인’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자신과 아내만 해당되었던 것. “부모님이 먼저 귀국했던 것처럼 곧이어 딸아이 식구들도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양산에 둥지를 틀다

2010년 봄, 함께사는 동포들과 원동면에서 열린 매화축제에 다녀왔다.

최정무씨와 함께 귀국길에 오른 동포들 중 40세대가 양산으로 오게 됐다. 상북면 대석리에 방금 지은 LH아파트에 보금자리를 만들게 됐다. 함께 온 동포들 중에는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많았고 할 줄 알아도 겨우 기본적인 대화 정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처음 정착할 때까지 뒷바라지해준 양산적십자 회원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고 최씨는 강조한다.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는 일로만 해도 많은 시일이 걸렸는데 적십자 회원들이 자기 일처럼 매일 와서 도와 주었습니다” 하지만 최씨처럼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인 1세대는 그래도 빨리 국적 회복이 되었지만 1946년생인 아내 정남준씨는 2세대라 한참 뒤에야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귀국한 이들에게 적십자 회원들의 지원은 큰 힘이 되었다. 겨울이 닥치면서 김장을 담궈 나눠주기도 하고 행정기관에 서류를 정리해 생활비 지원을 받도록 해 주는가 하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라 걸핏하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때마다 일일이 병원 왕래를 도와주었던 것이다.

딸의 암 판정, 양산에서 수술

그렇게 자리잡은 양산살이가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최정무 씨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일이었으니. 사할린에 사는 큰딸 아이가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며 한국에 오기를 원했다. 그쪽 병원에서도 부모님이 한국에 계시니 한국의 큰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너 온 딸이 양산부산대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날 하필이면 최씨는 충북 음성군에서 열린 사할린 동포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출타 중이었다. 당시 동포회장을 맡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건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아내의 다금한 목소리를 전화로 들었다. 4기 암이라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털썩 주저앉아 있는데 누가 다시 연락해 보란다. 몇 번 시도 끝에 통화가 된 아내는 진단 결과 자궁암 2기라 수술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7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딸아이는 정상을 되찾아 사할린으로 돌아갔고 지금은 정기적인 검사를 위해 한국을 찾는다고. 그 딸아이의 아들이 벌써 장가를 가 증손자를 낳았다고 자랑한다. “그것 뿐 아닙니다. 아내도 폐 수술에다 갑상선까지 양산부산대병원에서 수술했는데 지금은 아주 좋아요”라며 양산생활의 가장 큰 보람이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모국생활 외로움 달래기

영구귀국 바로 전해에 조카 결혼식을 맞은 아내 정남준씨(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처음 양산에 와서는 가장 힘든 것이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소일거리가 없었던 것. 사할린에서는 하루도 가만히 집안에 박혀 있는 일이 없을 정도인데, 이곳에서는 반대로 할 일이 없어 힘이 들었다. 아파트에 노인정이 있었지만 이미 와 살고 있던 한국사람들하고 어울리기는 너무 서먹해서 가지를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한겨울에도 잔디밭 벤치나 회의실 한켠에서 동포들끼리 어울려 체스를 두거나 잡담을 하면서 지냈다.

최씨는 생각했다. 이제 한국에 와서 살게 되었으니 그동안 몰랐던 한국을 제대로 알아가는 게 필요하다고. 가까이 양산이라는 곳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노라고. 그때부터 최씨는 카메라를 친구처럼 가까이 하게 됐다. 시간 날 때마다 양산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궁금증을 해소했다. 가끔은 아내와 둘이서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길을 익히고 명소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점점 양산을 알아가니까 양산처럼 살기 좋은 곳이 없더라고요. 일년 내내 기후가 온순하고 먹거리 풍부하지요, 병원 다니기 편리하지요. 정말 낙원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듭디다”라고 말하는 최씨 옆에서 아내가 거든다. “여름은 힘들어요. 너무 덥다고요”

여름은 사할린에서 보내

그렇다. 위도상으로 10도 이상 북쪽인 사할린은 겨울이 긴 나라로 눈보라가 일상인 곳이다. 그러니 이곳의 여름이 마치 열대지방처럼 느껴질 것 아닌가. 그래서 그들 부부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일년 중 여름 석 달은 사할린에 가서 보내기로. 딸아이 식구들과 함께 지내는 재미는 물론이고 그곳 여름은 그런대로 지낼 만 하니 세월 보내기가 더욱 윤택해졌다. 하지만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때면 가슴 한 구석이 휑하니 비는 것 같았다. “자식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가슴이 아파요” 작은딸 보다는 큰딸이 한국 정이 들어서인지 영구귀국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가끔 한다고 했다. “여기 오고 나서 경기도에 살던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내가 죽을 때 딸아이가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안락한 여생, 남은 소망은

60대 중반에 고국에 돌아와서 많은 혜택을 받고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고마움을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최씨는 최근 충청도에 이주해 살고 있던 어릴 적 친구가 마침 이곳에 자리가 비어 이사하게 되었다면서 어린애처럼 웃음을 짓는다. 10년을 함께 공부한 친구가 늘그막에 곁에서 살게 된다니 기쁠 수 밖에. “이제 남은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딸아이 식구들의 영구귀국 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는 최씨의 눈에 물기가 어린다.

때마침 전화 벨 소리가 울리더니 아내가 옆방으로 갔다가 러시아 말로 몇 마디 하더니 이내 거실로 나온다. “아니 왜 딸 전화 같은 데 이야기 더 하시지요”라는 기자의 말에 “괜찮아요, 좀 있다 다시 하면 되는걸요. 아무 때나 영상통화로 딸아이를 만날 수 있으니 그리 외롭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는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는 최씨의 표정이 흐뭇하다. 그렇게 해서 노부부의 양산살이는 또하루를 넘기고 있다. 어둠이 깔리는 겨울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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